Then, create your own. <잉글랜드 이즈 마인>
벽을 가득 채운 나만의 포스터, 글귀, 다짐들
타자기 소리, 파도
'안 돼'
영화가 끝나자마자 외치게 된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다.
The Smiths라는 밴드에 대해선 유명하다는 것 외엔 아는 바가 없었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그 썸머가 스미스 밴드의 노래를 듣고 있는 남자에게,
"I love The Smiths" 를 외쳤던 그 밴드.
영화를 보러 가던 길, The Smiths의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를 들으며
그래 들어본 적 있는 노래야, 참 좋다, 하며 갔다.
영화에 대한 설명과 예고편을 통해 머릿속에 담겼던 정보는
- 브릿팝의 셰익스피어
- "선택해야 해. 일 아니면 음악"
-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역사에 남았을 텐데 "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남았던 인상은,
- 명성, 혹은 명예에 대한 야망이 있던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성취한 사람이구나)
- 에너지가 넘치고, 목표를 향해 힘껏 달려가는 그런 영화겠구나
고로 (1) 나와는 그리 큰 연관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2)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는 얻을 수는 있겠다, 라는 생각. 사실 기대감이 크진 않았다. 음악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원동력이 될만한 에너지를 얻는 것은 반가운 일이니 잘 몰랐던 전설적인 밴드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분명 즐거울 것이라 싶었다.
(만약 메인 예고편의 목표가 나처럼 별다른 기대감 없이 영화관에 입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분명히 그것은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메인 예고편의 톤은 영화의 톤과 너무 다르게 만들어졌다. 좋은 전략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나처럼 기대했던 것보다 영화가 훨씬 좋았던 사람들의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대가 낮은 영화를 돈을 내고 보러 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기대가 크지 않아서였을까, 영화는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고 그래서 좋았다. 오랜만에 한 인물에 스스로를 투영하며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사람의 여행에 계속 계속 따라가고 싶을 만큼. '안 돼, 당신의 여행에 더 따라가게 해줘' 라고 외칠 만큼.
영화는 천재가 정상에 오르는 성공기를 담고 있지 않다. 전 세계 공통 숙어인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 조금 더 정확이 말하면 -알을 깨고 나왔다 생각했던 이가 자신 앞에 놓인 또 다른 막을 앞에 두고 보이는 좌절, 그 뒤의 한 걸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열망 넘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어디론가 한 걸음을 딛고자 하는 이들에게, 혹은 나는 분명 한 걸음 디뎠다 생각했는데 무엇인가 길을 잃어도 단단히 길을 잃은 것 같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들 모두에게 힘이 되어준다. 누구나 어떤 한 분야에서 '자신감에 찬 겁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아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은가. 주로 자신이 가장 애정 하는 분야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외면할 수 없는 바로 그 목소리.
영화를 보는 동안, 나의 그 목소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나는 과연 어딘가에 그토록 처절히 거절당한 적이 있는가. '자신감에 찬 겁쟁이'로서 간신히 스스로를 달래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막힘없이 걸어나갈 희망에 차 있던 바로 그때, 가장 믿었던 그 길 마저 나에게 등을 돌렸던 순간을 나는 얼마나 처절하게 경험했는가. 그 순간을 과연 나는 겪었는가? 겪었다면 나는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가. 겪은 것이 아니라면, 그때가 왔을 때 나는 다시 그 길로 한 걸음 내딜 수 있을 것인가.
시대 불문 만국 공통의 영웅 서사 구조에선 이를 '시련'의 기간이라 일컫는다. 내게 놓인 관문을 통과했다 느낀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가장 깊숙한 어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순간. 연속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이 순간을 두고 많은 신화 속 주인공들은 비참함마저 품격 있게 해처 나가지만, 현실의 우리는 참 찌질하다. 찌질함을 숙명으로 갖고 태어난 듯 우리는 모두가 참 찌질하다.
이왕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찌질함을 타고 난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숙명 속 가장 멋있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의내리는 그 가장 멋있는 방법의 다른 말은 -그 찌질한 내가 주변인의 무수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도움에 기댈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도움을 받아 나아갈 줄 아는 것-이다.
그렇게 어딘가 기대고 싶을 때마다 문득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영화는 그 깊은 동굴에 빠져 있을 때 생각보다 내게 훨씬 더 큰 힘이 되어줄 것 같다.
그 생각보다도 더 큰 힘은 주인공 모리세이보단 그의 주변인들로부터 나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티븐의 역할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 다들 내 행복에 그리 관심을 갖지?"
_ 영화 속 불평 아닌 불평처럼 쓰인 이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나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이가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보는이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나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포함하여.
이를 두고 비교의 비극에 자신을 빠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진정 행운아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가장 큰 능력은 자신의 행복에 신경 써주는 이들을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 이 둘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히 내포된 능력이다. 다른 말로, 우린 모두가 행운아일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이다, 라고 믿는다.
그치만 분명 그이가 조금 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탁월한 어머니를 곁에 두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정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우린 모두 그가 아니고 그일 필요가 없다. 영화는 그에게 끼친 모든 것들을 담지 못한다. 그 선별된 이야기 속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면 된다. 간접 경험의 이득. 그렇게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만들어준 세계를 스스로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좋아보이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 영화 속 또 하나의 인물 조니.
실제로 조니는 스티븐을 이전부터 눈에 두고 그의 곁을 맴돌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맴돌아, 그는 자신이 맴도는 이의 가장 필요한 이가 되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찾아간다. 그의 집 문을 두드린다.
"조니가 왔다."
영화 속 조니의 방문은 많은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부디 영화를 가슴에 담게 될 많은 사람들이 순수하되 집요한, 해맑은 듯 듬직한 조니가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고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나아가 그 사람의 집 앞에 서 문을 두드릴 수 있기를.
다큐져니 옆동네산책 #6옆동
네산책 #6
<England is Mine (잉글랜드 이즈 마인) (2017,Mark Gill)>
2018. 07.03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영화를 보고 나온 밤,
바람에 나뭇가지는 매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살짝 숨이 막힐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었지만, 이상하게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 밤 버스를 탔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이전 날엔 비가 쏟아져 내렸고,
나는 당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있는 힘껏 달려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