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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져니 Jul 19. 2020

<미 비포 유>와 Ableism

[영문과] Advanced English Reading

*이 글에는 영화 <미 비포 유>의 결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절학기와 함께 수료를 마음먹었던 2019년 여름 방학, 휴학과 추가학기 끝 드디어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래도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 생각했는데, 한 단어가 내게 그런 것은 애초에 없다며 비웃었다. 바로 "Ableism"이었다.


위키백과 "Ableism"


"Ableism"이란 쉽게 말해 이 사회가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을 정상값으로 두는 것을 말한다. 돌이켜보니 학교에서 배웠던 수많은 개념 중에 Ableism은 없었다. 졸업하기 전 이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개념을 알지도 못한 채 사회에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가 되었건 생에 한 번쯤 반드시 신체적/정신적으로 '장애'를 겪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 여기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간다. 그런 의식과 차별에 동참하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어째서 우리 사회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걸까?


이 Ableism이 가장 명확히 묻어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미 비포 유(Me Before you)>(2016)다.



영화 <미 비포 유>의 핵심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돈, 명예, 외모,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한 남자가 불의의 사고로 신체 능력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어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덧붙이면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 아름답고 성격 좋은 사랑하는 사이의 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도가 되겠다.


나는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논란에 휩싸였던 이유가 종교적 이유의 '안락사 반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촌스러운 행위"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스스로의 죽음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스스로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 비포 유>가 Ableism의 표본이자 말도 안 되게 잔인한 이유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주인공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유일한 이유가 "신체적 장애"라는 점 때문이다. 이는 당신이 아무리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성공의 요건을 갖춘 사람이어도 장애를 갖고 있다면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스스로의 선택'이라 여기고 있는 동안, 그 안에 묵살된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영화 주인공과 같은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회에서 무수히 부당한 대우와 차별들을 마주하며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 영화는 이 모든 노력과 삶을 송두리째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www.post-gazette.com
@www.sbs.com.au


소름이 돋는 점은 내가 이 영화를 볼 당시 얼마나 당연스럽게 이 논리를 수용했는가이다. 영화를 보는 나는 '그런 상황'이니까 당연히 삶의 의미를 잃어도 되는 것이고, 당연히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 안락사를 한 사람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안락사의 논의로 영화 주제를 끌고 갔던 것이다.

하지만 <미 비포 유>는 '안락사 논의'에 대한 영화가 될 수 없다. 남자 주인공 Will 은 '의지'를 함축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없다.



영화가 안락사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자 했다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Will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보여주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논했어야 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다면, Will의 죽음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결정으로 그려서는 안 되었다. 더욱이 그것을 로맨틱하게 그려서는 더더욱 안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저질렀던 과오처럼 윌의 안락사를 "이해 가능한 일"로 받아들이고 그 안의 잔인한 Ableism을 보지 못했던 이유가, 이 논리가 신자유주의 속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논리와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인간 존재 가치를 "쓸모없음/쓸모 있음"의 효용성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그것에 의한 스르로의 검열을 너무나도 익숙하게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에게는 이미 '쓸모없는 사람', '행복을 박탈당한 사람'이라는 무기력함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모든 인간 존재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가치가 100이라면, 그 가치는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100인 것이다. 팔이 한쪽 잘려나간다고, 정신적으로 질환이 생긴다고 그 100이 90이 되고, 50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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