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5일)
누런 진돗개 황진이가 죽었다. 귀여운 친구, 매력적인 친구였다. 앙칼진 데도 있었고 무심할 때도 있었지만 먼 산을 보며 오줌을 눌 때는 늠름했다. 암컷으로 태어났는데도 목소리는 우렁찼고, 조금의 위협이라도 있다 싶으면 씩씩하게 짖었다. 예의와 시근이 있어 아무에게나 짖지않았다. 주인을 잘 따랐으며 주인의 친구에게는 경계하되 짖지않았다. 세상물정 다 아는 어른스러운 표정이지만 마음에 드는 노란 방망이 인형과 주황색 납작한 웃는 장난감에는 누구도 손 대지 못하게 하며 좋아했다. 고양이를 쫓을 때는 진지했고, 앞 다리로 만져가며 개구리를 관찰할 땐 천진했다. 개로 태어나 두 나라에서 지냈고 동남아 더운 날씨에 큰 호수에 몸을 담그며 즐겁게 놀았다. 한국, 부산에서 만 오년 동안 사계절을 겪으며 힘차게 뛰어다녔다. 갑자기 뛰기를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볼 땐 그 호방한 기상에 옆에서 보는 내가 다 멋졌다. 집에 다와갈 때는 의젓하게 걸었는데 살랑거리는 엉덩이가 매력적이었다. 베트남으로 올 때 비행기 짐칸에 실려 낯선 곳으로 가는 황망함을 헤아리진 못한다. 그때 이미 병세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던 것 같다. 반딧불이와 함께 좋은 공기 마시며 호전되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호치민에서 한달 반을 살다 2023년 6월 15일 00:01분에 황진이는 우리와 이별했다. 산소호흡기를 빌려오고 주사로 밥을 먹이며 마지막까지 살려보려 안간힘을 썼던 아내의 따뜻한 품에서 최후의 숨을 몰아쉰 뒤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누런 털로 덮인 푹신한 맨발과 악수했고 이내 네발로 돌아다닌 그 고단함의 마지막 힘이 빠져나갔다. 매 순간 백퍼센트 지금에 충실했던 화끈한 삶이었다.
황진이가 차에 실려와 우리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호치민에서 살고 있었다. 김해로 잠시 와있던 차에 황진이는 마침 우리 곁으로 왔었다. 아들은 낯선 나라, 새로운 환경에 힘들게 적응하려던 때였는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어린 황진이를 보며 아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을 테다. 부모로서 위로하거나 안아주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했었는데 황진이는 아무 말 하지 않고도 아들을 위로했다. 미음 공단 운동장에서 축구공과 놀 땐 투명한 침을 흘리며 아내의 얼굴을 핥았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던 황진이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폐에 종양이 커진 상황에서도 산책을 하며 좋아했고 고양이를 쫓아다녔다. 뛰어 다니기가 힘들어질 때즈음엔 마당에 나가 풀 숲에 앉아 있던 날들이 많았는데 나무들과 지난 얘기를 자랑스레 나눴을지도 모른다. 무더운 날씨에 호수에 들어가기를 몇 번, 물에서 노는 게 좋았던지 계속 호수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병세가 악화될까 못들어가게 했던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식탁에서 저녁을 먹을 때면 늘 우리 옆에 조봇하게 앉아 다 먹기를 기다렸고, 밤에는 마당으로 나가 집안의 경계에 여념 없었다. 진이 덕에 많이 즐거웠다. 늦게나마 우리 곁에 와줘서 고맙다. 근데, 축구장 잔디밭에서 공 던지기도 해야되고 호숫가 긴 산책길도 같이 가야되고 수영도 같이 하고 누가 빠른지 달리기도 해야되고, 테니스장에서 공놀이도 해야되고, 아직 진이와 못한 게 많은데, 신나게 더 놀고 싶은데, 잘가 진아, 우리 앙진 영원히 편안하기를. 황진아, 언젠가 인간의 자매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 다시 만나 못놀았던 것까지 내일은 없다하고 신나게 놀자.
지금 여기 -심보선-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는다
신은 얼마나 많은 도형들을 이어 붙여
인간의 영혼을 만들었는지!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무에서 무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