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에 대한 메타비평, 베토벤
뒤샹의 ‘샘’은 개념미술의 시초가 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뒤샹은 다다이즘에 참여하였으며 다다이즘이란 1차 세계대전 이후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이 기성의 모든 문화를 부정하려는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단어를 적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이것을 무작위로 꺼내어서 시로 발표하는 등 기존의 문화를 조롱하였다.
뒤샹의 ‘샘’은 남성소변기에 사인을 하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설치 작품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시절 중 2병에 걸린 소년들을 유혹하는 구호인 반조유리(반항은 이유가 있고 이치를 만든다. 반항하는 자체로 의미가 있다.)처럼 기존의 미술에 무조건 반발한 것이 아니고 개념과 이미지의 대조미를 구축한 것이다.
더불어 공산품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실용미에 반한 측면도 있다.
보색대비처럼 선명한 이미지의 대비를 초래하는 ‘샘’이라는 제목은 가히 제목 붙이기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
‘샘’이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맑은 물이 솟구치는 이미지여서 소변기의 오줌이 흘러내리는 이미지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비슷한 색상의 조화되는 것처럼 물을 매개체로 하여 오줌과 샘물이 서로 조화되기도 한다.
오즘은 물의 순환을 거쳐 샘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 둘은 서로 일체라고 할 수 있다. 샘물을 마시고 오줌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소변기 밑의 구멍을 통해 샘물이 솟는 것을 상상한다면 이 물을 마시는 것은 꺼림칙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형적 이미지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제목과 이미지의 괴리를 통해 관념과 이미지의 관계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 이 작품의 주목적일 것이다.
뒤샹의 유일한 실수는 소변기에 사인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인 때문에 보편적인 소변기가 유일한 것이 되었다. 작품에 사인을 해야 한다는 관습에 깨어 있지 못한 뒤샹이 무심코 따른 결과 보편적인 의문이 특수한 의문이 된 것이다.
‘샘’에 대한 메타 비평으로 소변기를 거꾸로 세우고 그 제목을 폭포라고 하고 싶다.
샘과 폭포를 나란히 설치한다면 서로의 존재 의의를 더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공산품의 군더더기 없는 실용미에 뒤샹이 반했다고 했는데 실용미를 재발견한 작품도 있고 이를 이용한 작품도 있다.
보틀넥이라는 와인 병 꽂이 회전 원통 셀터 자전거 휠 같은 작품이 있다.
뒤샹의 선구적 작업 이후 공산품을 이용한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피카소의 투우인가? 황소인가? 하는 작품으로 자전거 안장과 핸들로 만들어 진 작품이다. 안장은 황소머리와 비슷하고 핸들은 뿔을 닮았다. 자전거가 후진이 안 되는 것처럼 황소의 행태도 비슷하다. 안장과 핸들을 거꾸로 하면 황소머리와 비슷해진다는 것을 발견한 피카소에 역발상과 눈썰미에 감탄했다. 그 외 대표적인 작품으로 백남준의 옥상환풍기를 이용한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소라’ 또는 ‘소라의 꿈’이라고 기억하는데 옥상환풍기의 둥근 날개에 무지개색이 칠해져 있으면 소라의 꿈이 맞을 것 같다. 반복미가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뒤샹의 보트 넥에 대한 오마주가 틀림없다.
이 작품은 부산광안리 해변 도로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다.
뒤샹의 마지막 그림은 거의 2/3를 차지하는 흰 벽에 대각선 모양으로 길게 균열이 가 있고 오른쪽 귀퉁이에 담쟁이덩굴이 있는데 균열 쪽으로 한 가닥 덩굴이 뻗어 있고 왼쪽 귀퉁이에 체스를 두는 남녀가 있는데 여자는 옷을 벗고 있고 남자는 정장을 갖춰 입고 뒤에는 문갑모양인지 관모양인지 시커먼 물체가 놓여 있었다. 벽은 금방 무너질 듯이 위태롭게 보이고 균열 위로 뻗은 한 가닥 담쟁이덩굴은 금방 찢어질 듯 연약하게 보인다. 시대적 배경이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이거나 전쟁 중이거나 직후일 수도 있는데 직전이라면 예술가의 예민한 촉수로 균열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 중이라면 사회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고, 전쟁 직후라면 전후처리를 위한 갈등의 표현일 수 있다. 뒤샹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개인적 미학의 개발에 몰두하는 성향이어서 이런 사회적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전혀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안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서 1악장은 귀족들에게 작곡료를 떼먹힌 절망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고 2악장에서 마음을 추스르려고 하였으나 3악장에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분노가 끓어오르듯 솟구치는 음형으로 시작하고 중간에 귀족들을 질타하듯이 망치로 두 번 내리치는 음형이 나타난다. 이 해석과 반대로 월광이라는 부제의 시초가 된 1악장은 마치 루체른 호수에 비치는 달빛 같다는 모 평론가의 말처럼 순수하게 절대 미학적 입장에서 해소하는 게 가능하다. 실제는 두 해소의 중간일 수 있다.
작곡료를 못 받아 생계가 곤란해진 베토벤이 가벼운 우울증에 빠졌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슬프고 아름다운 선율의 1악장을 짓고 슬픔이 다한 베토벤은 경과구격인 2악장으로 넘어간다. 3악장은 격렬한 데 1,2악장이 차분했으므로 이번에는 빠르고 격렬한 악장이 나올 차례긴 하다. 3악장의 주제는 확실히 분노라고 생각한다. 분노가 솟구치듯이 솟아오르는 음형으로 시작하여 귀족들을 질타하듯 두 번의 연타가 이어지고 이 패턴이 몇 번 반복되고 분이 풀린 베토벤이
‘내가 너무 심했나?’하고 반성하는 듯한 선율이 이어지다가
‘그래 이 분노는 정당한 거야!’하고 확신하듯이 호쾌하게 분노를 터뜨리면서 3악장을 마무리한다.
베토벤의 평소 소신이 신분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고 때마침 몽퇴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자유 평등 사상이 대유행을 하면서 깊이 감명을 받은 그가 차별 없는 민주주의를 꿈꾸게 되었다.
9번 교향곡 4악장 ‘합창’의 제목이 원래 ‘자유의 송가’인데 검열을 의식하여 ‘환희의 송가’로 제목과 내용을 바꾸었다.
베토벤이 젊었을 때 괴테를 만난 적이 있는데 괴테가 마주오던 귀족을 보더니 모자를 벗고 정중히 절을 하는 것을 보고 노예근성이 뿌리 깊게 박힌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월광 소나타 3악장’의 정서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틀림없다.
뒤샹의 그림도 사회적 관점과 순수 미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데 사회적 관점에서 붙여 본 제목은 ‘불안한 평화’이고 순수 미학적 관점에서 붙여본 제목은 ‘갈등과 균열의 변주곡’이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불안한 평화라는 제목은 전쟁 직전을 상정한 것이다. 금방 무너질듯하게 균열이간 담은 대립하는 두 세력을 상징하고, 균열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가냘픈 담쟁이덩굴은 두 세력을 통합하는 양심 또는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쟁 중이라면 적십자가 그려진 구급차를 공격하지 않는다든지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이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행동 강령은 무시되기 일 수인데 담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담쟁이덩굴은 흔적도 없이 찢겨 나가는 상황과 비슷하다. 갈등과 균열의 변주곡이라 한 것은 담이 균열 된 것도 있지만 체스를 두는 남녀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옷을 벗고 있는 것과 남자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대조적이지만 여자의 심리를 보면 패션에 신경 쓰면서도 노출이 여성해방의 척도인 양 생각하는 모순이 있다. 남자는 노출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벗을 때 민망함을 느끼고 이것은 여자보다 심할지도 모른다.
탱크 탑을 입고 다니는 남자가 없고 배꼽을 노출 시키고 다니는 남자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심리적 갈등을 부각시키고 정체성의 균열을 의도한 것이지도 모른다.
벗은 여자와 입은 남자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대조를 위해서지만 뒤샹의 여자나 신에 대한 집착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타잔과 제인처럼 야성적 남자와 문화적 여자의 조합을 기대하는 감상자의 예측을 배신함으로서 심리적인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목적 중 하나가 아닌가 짐작한다.
남자를 아파치족처럼 성장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그리고 흑인으로 그린다면 사회 통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되겠지만 뒤샹은 그 정도로 정치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다. 체스 말의 색도 중요한데 허여 멀건한 벗은 여자의 앞에는 검은 말이 있는 게 맞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앞에는 흰말이 있는 게 맞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체스냐 하는 것도 중요한데 뒤샹이 만년에 체스에 빠져 작품 활동을 등한시 할 정도로 몰두한 것이 큰 원인이나 더 큰 이유는 장기처럼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 중일 때 국제적 분쟁이 일어난 경우 미국의 전략가인 브레제진스키는 이 상황을 거대한 체스 판으로 비유했다. 전쟁 직전이거나 전쟁 중일 때 이 상황을 체스로 묘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옷 입은 남자는 민주적인 문명국을 상징하고 옷 벗은 여자는 야만적인 독재국을 상징한다고 볼 때, 남자 앞의 말은 선을 상징하는 흰색이 맞고 여자 앞의 말은 악을 상징하는 검은 색이 맞는데, 색이 바뀌었다면 감상자의 기대를 배신하여 심리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일 것이다.
대립하는 두 남녀지만 머릿속 체스의 룰은 공통이고 이것은 마치 균열을 가로지르는 담쟁이덩굴 같다. 담쟁이덩굴이 수 천 수 만 번 얽힌다면 담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겠지만 한 가닥으로는 막을 수 없다. 체스를 두는 남녀 뒤로 시커먼 가구 같은 것이 있는데 만약 관이라면 전쟁의 끝은 죽음뿐이라는 걸 상징함과 동시에 본인의 죽음을 예감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그림의 메타비평으로 베토벤의 관현악곡인 ‘웰링턴의 승리’를 연주하고 싶다. 베토벤이 갈등의 아이콘인데다 이 곡은 전쟁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민주주의를 실현할 적임자로 보고 ‘영웅교향곡’까지 작곡했건만 나폴레옹은 베토벤의 기대를 져 버리고 황제가 되었다.
베토벤의 아버지가 자식의 출세를 위하여 피아노 연습을 강요하였다. 베토벤은 음악이 좋으면서도 아버지의 강요는 싫은 모순에 빠져 갈등하게 되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아버지의 의지를 닮아 베토벤 음악의 특징은 의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베토벤이 악성으로 불리는 이유가 청각 상실을 극복한 이유도 있지만 사회 변혁을 꿈꾸었고 굳은 의지로 음악개혁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고전파를 마무리하고 낭만파를 열 수 있었다.
한 때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존경했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패배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음악을 작곡하자니 베토벤의 마음이 착잡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애정이 미움으로 변해 나폴레옹의 패배를 진심으로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후자가 진실에 가까울 것 이다. 사회변혁과 음악 개혁을 위하여 기성세대와의 균열과 갈등을 피할 수 없고, 의지에 안주하려는 본능과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웰링턴의 승리’를 이 그림의 메타비평으로 선택한 이유이다. 균열을 가로 지르는 담쟁이덩굴에 해당하는 것은 적대적인 두 진영에 공통되는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