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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메스 May 01. 2018

아마추어에겐 현대미술이 오히려 더 쉽다(2_4/11)

백남준, 사기, 어려운 예술평론

<백남준>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시조로 알려져 있고 그 외에 글로벌 네트워크아트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그 외 창조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백남준은 현대 미술이 고등 사기라는 말을 했는데 사기를 치려면 그럴 듯한 스토리가 있어야 된다.

백남준의 미학적 스토리를 알아보자.

비디오 아트의 최고봉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작품인 다다익선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원뿔모양으로 모니터를 배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웅장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백남준은 제목처럼 더 크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은 원뿔의 비례미가 돋보이고 모니터를 띄엄띄엄 설치하고 모니터 사이도 막지 않아 골격미를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백남준 특유의 발산하고 수렴되는 무늬인데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물결 같은 자연미를 띠고 있다. 이것은 같은 꽃이 집단적으로 피어 있는 상황과 닮았는데 꽃봉오리도 있고 반쯤 핀 꽃도 있고 활짝 핀 꽃도 있고 시든 꽃도 있는데 활짝 핀 꽃도 크기가 달라서 꽃밭을 지겹지 않게 바라 볼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것처럼 다다익선도 모니터 마다 다른 모양이 연출되기에 지겹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물결에 비유했는데 이것은 무늬가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물결과 더 비슷하려면 무늬가 시시각각 변해야 하는데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게 문제이다.만약 백남준이 공학적 지식이 있었더라면 모니터에 움직임을 도입하여 더 재미있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가령 확장되는 무늬에는 모니터를 앞으로 밀어내고 수축되는 무늬에는 뒤로 후퇴시키거나 반대로 해도 재미있을 것 이다.

브라운관이 무거워서 동작 구현이 어렵다면 올레드 모니터로 바꾸면 될 것이다.

올레드 모니터를 두 장 겹치고 전선과 신호선으로 매달아 모빌을 만들 수 있다.

이 비디오 모빌은 칼터에 대한 오마쥬가 될 것이다.

올레드 모니터로 다다익선처럼 원통으로 구성하고 모니터마다 다른 끌개로 프랙탈 영상을 전개하고 바람에 일렁이는 대나무 숲처럼 모니터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더 긴 시간 동안 지겹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원통을 여러 개 세우고 모니터 마다 자유롭게 상하좌우 전후 운동과 각도까지 변화시키고 프랙탈적인 움직임을 구현한다면, 그리고 프랙탈 영상을 전개하는 과정을 전체 모니터에 무작위로 전개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쳐다봐도 지겹지 않을 것이다.

음악에 맞춰 모니터를 움직이고 영상을 음악과 연동시킨다면 비디오 모바일 댄스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탄생시키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이이언의 몽환적 음악에 몽환적 영상을 전개하고 여러 개의 모니터에 로봇 팔을 붙여 음악에 맞춰 움직이게 한다면 충격적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올림픽 개폐막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자 한다. 

비디오 모빌에 바퀴를 달고 무용수들이 음악과 영상에 맞춰 춤을 추게 하고 전체 관람객에게 배터리를 장착한 올레드 모니터를 제공하여 중앙에서 무선으로 모니터를 조종한다면 자동매스게임이 되어 웅장하고 화려한 장관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올레드 모니터냐면LCD와LED 모니터는 백라이트가 들어가기 때문에 무거울 수밖에 없다.

올레드 모니터는 유기 발광 소자로 되어 있어 얇고 가벼워 받침대를 포함해도 장시간 무릎에 놓아둘 수 있다.

사용 후에는 휴대폰 보조모니터 야외용TV로 사용하면 될 것이다.


백라이트는 에너지가 강한 푸른빛이나 자외선이 나오기 때문에 소위 블루 라이트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시력을 해치고 수면을 방해한다. 올레드 모니터는 특수 화합물이 전압을 걸면 발광하기 때문에 블루라이트 문제가 원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다다이즘에서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브라운관 생산이 전 세계적으로 중지되었는데 만약 모니터 중 하나라도 고장 난다면 전체 모니터를 최신형으로 교체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백남준이 살아있다면 작가에게 물어보면 되는데 사망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나라 공무원 행태로 보아 예비 모니터를 구입해 놓았을 리 만무하다.

문제는 브라운관의 가로대 세로 비율이 3:2 인데 반해 최근에 생산되는 모니터는 16:9인 것이다. 원형을 존중하려면 공장에 3:2의 모니터를 주문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16:9의 모니터를 사용한다면 가로 길이를 맞추느냐, 세로길이를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원형을 존중한다면 세로길이를 맞추고 화면의 좌우는 공백으로 두고 3:2로 맞추는 게 타당하다. 모니터 크기에 대한 미학적 고려를 당연히 했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화면의 좌우를 늘려 모니터를 꽉 채우고 올레드 모니터를 휘어 정면에서 보기에 3:2로 맞추면 된다. 볼록하게 하느냐 오목하게 하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브라운관이 조금 볼록하므로 볼록하게 하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원형의 훼손은 피할 수 없다.


두 번째 중요한 작품은TV부처이다.

이 작품은 명상하는 자세를 취한 등신대의 불상을 준비하고 불상 앞 약1.2M거리 바닥에 작은TV를 놓고 그 옆에 불상에 초점을 맞춘TV카메라를 켜고TV에 불상의 모습이 나오게 한 다음 불상이TV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연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1차적 의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이 명상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좌선할 때 방석을 깔고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를 틀고 척추를 꼿꼿이 펴고 눈을 반쯤 감고 자연스럽게1M쯤 앞의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머릿속 으로는 화두를 참구하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무심히 바라보게 하려고 노력한다.

눈을 감으면 주관적 상상의 세계에 빠지고 눈을 뜨면 객관적 현실 세계를 보게 되는데 눈을 반쯤 감으면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보게 된다고 한다.

눈을 반쯤 감고 자신을 관찰하면 꿈과 희망 같은 주관적 요소와 더불어 객관적 처지를 깨닫게 되어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2차적 의미는TV카메라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하듯 부모를 비롯한 남의 평가로 자아관념이 형성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지적한 것이다.

동물은 자아관념이 없는데 자신은 자기 모습을 볼 수 없고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고래 중 일부는 자아관념을 가진 듯이 보이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돌고래간의 언어 때문인 것 같다.

 3차적 의미는TV가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켜면 쉽게 꺼지 못하는 것 같다. TV를 보지 않을 때도 습관적으로 켜두기도 하고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한 것이다.

TV가 바보상자라고 하는데 지금은 평면형 TV만 만드니 바보 판 이라고 해야겠다.

TV 시청시간이 길수록 비판 정신이 사라지고 점점 수동적으로 되면서 자극적 화면에 익숙해져 감정이 무뎌지고 어휘력까지 감퇴한다. 결국 흙으로 빚은 불상처럼 가만히 앉아서 멍청히TV만 바로 보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4차적 의미는 독서가 자아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과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채널을 찾는 과정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듯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보도 프로그램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앵커의 말에 무조건 동조하거나 반대하기도 한다. 사안에 따라 동조하거나 반대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투명한 사람은 없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색깔을 지닌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다.

 5차적 의미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감정이입하여 주인공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차적 의미는 여성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데 드라마 주인공의 옷차림새나 장신구나 헤어스타일이나 들고 있는 핸드백이나 심지어 집의 인테리어까지 신경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된 건지 나름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관찰한 건지 애매하다.

여성은 멀티 플레이어니까 둘 다일 것이다.

때론 전문가가 해준 차림새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생긴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자 주인공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때문인 것 같다.

 7차적 의미는TV에 나온 자기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사회적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해석할 수 있고 SNS에 올린 자기 이미지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안달하는 현대인의 습관을 미리 예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 유난히 거울이 많은 것도 동양적 눈치문화의 영향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8차적 의미는 부처님의 모습을 본 뜬 불상을 보고 부처님이 계신 듯 상상하는 인간의 특징을 지적한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 조작에 휘둘리기 쉬우니까 두 눈을 떠서 똑바로 보고 각성하라는 뜻도 있는 것 같다.


이 티비 붓다를 처음 사진으로 접했을 때 그 전체의미가 쓰나미처럼 몰려와서 숨이 막힐 정도로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함의가 풍부한 작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나 같으면 TV 스피커를 놀리지 않고 시타르 독주나 아유르 베다에 쓰일 법한 대금을 닮은 음색의 악기 독주를 낮게 틀어 고즈넉하게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겠다.

아유르 베다란 인도고유의 심신 치유의학이다.

한국음악으로는 ‘천축 가는 길’이라는 시타르연주나 황병기의 ‘침향무’같은 가야금과 장고 이중주가 적당하다.

침묵 속에 의미가 선명히 떠오르게 하는 것도 좋으나 음악의 방해를 뚫고 숨겨진 의미를 하나하나 건져 올리는 것도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층에는 전자 초고속도로라는 작품이 있는데 진공관등 전자부품을 얼기설기 엮어 말모양을 만들고 뒤에는 인형을 태운 마차를 연결한 작품이다.

전자는 진공관의 열전자와 연결되고N형 반도체의 전자나P형 반도체의 전자가 빠진 정공과 연결된다.

고속도로는 도보여행시대에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돌로 포장 된 길인데 오늘날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고 초라는 말은 말에 쓰인 전자부품을 모두 병렬 연결하면 전자가 엄청나게 흐를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하고 단순히 현대적인 뉘앙스를 주기 위해 붙인 말일 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에서 전 유럽으로 뻗은 포장도로는 유사시에 로마 군인들을 전차로 신속히 기동 타격할 수 있기 때문에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전차는 민수용으로 개량되어 마차가 되고 중세 근대에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이 도로를 통해 유렵의 물산과 인재를 교류하고 왕실의 통혼이 이뤄져 유럽의 통합이 가능해졌다. 이 도로의 혜택을 못 받은 산악국가인 스위스가EU의 비회원국임과 영국이 브렉시트을 감행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고대 중세 근대의 교통 여건을 작품과 제목에 교묘히 녹여 넣은 것이다. 이런 제목은 뒤샹의‘샘’처럼 제목 짓기의 예술에 속하는데‘샘’은 보색대비처럼 이미지의 대조에 중점을 둔 반면, 이 작품은 비슷한 색상의 조화처럼 말과 마차가 어울리고, 말의 이동성과 전자부품내의 전자가 이동하는 것이 어울리고, 전체적으로 고풍스런 작품과 현대적인 제목이 대조되어 조화와 대조가 두루 공존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메타비평으로 정보초고속도로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정보초고속도로라면 누구나 해저 광케이블을 떠올릴 것이다. 광섬유다발을 얼기설기 엮는다면 하수인 것이다. 고수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결합하여 다양한 의미를 표현하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개척하며 상상의 지평을 넓힌다.

빛은 파장이 짧은 전자파이고 전자궤도가 이동할 때 빛이 방출되거나 흡수됨으로 앞의 설명이 정보초고속도로라는 제목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인터넷 전용 컴퓨터의 목적은 사람들의 머릿속 데이터를 빨리 목적지로 이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전자 부품을 엮은 말 모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전자초고속도로라는 제목으로는 하드웨어니까 마차에 타고 있는 인형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데 정보초고속도로라는 제목으로는 소프트웨어니까 인형의 역할이 중요해진다.사람이 직접 도보나 마차를 이용해서 각 지역의 소식을 전하던 시절에 마차가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돌 포장도로는 정보초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백남준이 뉴욕 현대 미술계에 데뷔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당시 무명 작가였던 백남준이 어떻게 이름을 알릴까 고심하던 중에 바이올린에 줄을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해프닝을 벌였다. 바이올린의 공명통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주목을 끌어‘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쳐다보는 순간 귀하게 여기는 바이올린이 땅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청각과 시각의 이중적 충격에 한참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마치 안동 같은 보수적인 지방도시에 백남준에 대한 오마쥬를 한다고 흑인이 카메라도 없이 바이올린을 끌고 다닌다면 당시 뉴욕시민이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해프닝을 벌인 이유가 단지 주목을 끌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귀한 바이올린을 버리지도 못하고 애물단지가 되어 개처럼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명연주자를 만나 화려한 연주로 감동을 주기도 하듯이 현대 미술의 명연주자가 될 기회를 준다면 작품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비록 지금은 끌려 다니는 바이올린처럼 현대 미술 조류에 끌려 다니지만 앞으로 바이올린을 끄는 사람처럼 현대 미술계를 이끄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며칠 동안 바이올린을 끌고 다닌 덕분에 백남준은 유명인이 되었고 이후 의지대로 현대미술계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현대 미술이 백남준을 앞세워 말솜씨와 글 솜씨에 의지한 사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했는데 이 시도가 성공적인지 모르겠다.


외국평론가들은 덜 하지만 한국평론가들은 유난히 글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품에 대한 생각이 미처 정리되지 못한 평론가가 분석력 실력 경험과 상상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평론가니까 남다르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최악의 어려운 문장이 나올 것이다. 어려운 글을 쓰는 까닭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심오한 것을 표현한 작품을 바르게 이해하고 평론하는데 우리의 지적 수준이 그에 못 미쳐서 어렵게 느껴지는 게 한 원인이다. 심오한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 ‘이불’을 꼽을 수 있다. 이불의 작품은 기괴하고 기발한 조형미로 유명한데 미술 잡지의 소개에 의하면 이 작가의 작업실에는 어려운 철학 책과 사회학 책이 가득하고 평소의 대화에 사회학적인 전문용어를 많이 쓰는 걸로 봐서 탄탄한 철학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이 많은 작가가 만든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힘든데 상징성과 작품에 깃든 철학을 외형만 보고 수수께끼 풀 듯 하면 헛다리짚기 일쑤이다. 평론가라면 작가에게 제작 의도를 물어서라도 상징성과 작품에 깃든 철학과 외형의 연관성을 따져보고 미학적 의의를 설명하고 미술사적 의미를 평가해야 한다. 평론이 어려워지는 이유가 작가에게 묻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작품을 이해 못해서 횡설수설하는 경우이다. 작가는 모호한 충동에 휩싸여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평론가라면 절대 그 감정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모호한 충동에 동조할수록 평론을 읽는 독자는 더 갈피를 못 잡게 될 것이다. 작가의 무의식까지 냉철 명쾌하게 분석하여 작가가 표현하려 한 미적요소를 깔끔하게 정리한다면 독자는 갈피를 잡게 될 것이다.

셋째, 형편없는 작품을 난해한 글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띄우는 경우이다. 일부 평론가가 난해한 글 솜씨를 즐기는 게 아닌 가하는 의심이 든다.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글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장을 난해하게 만드는 방법은 평소 안 쓰는 전문 용어를 남용하거나 문법에 안 맞는 한자어를 남발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집단 구획의식에 대하여 논하라’는 서울대 논술 문제가 생각난다. 영어는 명사가 세 번 반복되어도 어색하지 않으나 한국어는 명사가 세 번 연이어 나오면 반드시 조사가 붙어야 한다. 집단 구획의식은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고 집단을 구획하는 의식이라고 해야 맞다. 쉽게 말하면 한국의 패거리 문화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이다. 지연, 학연, 혈연에 의한 편 가르기의 폐해에 대해 논하면 기본 점수는 딸 수 있을 것이다. 최순실 사건을 겪어보니 이해관계가 패거리를 만드는 본질임을 깨달았다. 돈과 명예의 이해관계를 바탕에 깔고 사색당쟁을 비롯한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한 편 가르기의 공과와 지연, 학연, 혈연에 따른 편 가르기의 공과를 지적하고 왕따 문제와 공격적 팬덤 문화에 대하여 성찰하고 외국인 차별 현상을 거론하고 외국사례까지 비교 분석한다면 만점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어법에 안 맞는 문제가 출제 된 배경은 영어 번역투에 익숙한 교수의 엘리트주의나 체면이라고 생각한다. 졸작을 난해한 문장으로 띄우는 것은 분명 사기다. 작가 중에 자기의 생각에 취해 사기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긴박한 순간을 표현한다고 프레임에 종이를 붙이고 높은 데에서 뛰어내려 종이에 구멍을 뚫고 이것을 작품이라고 전시한 적이 있다. 긴박함만 있고 여러 면에서 살펴보아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미술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 의도와 표현만 있고 아름다움이 없는 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시간의 추이를 보여준다며 썩어가는 생선을 전시하기도 하고, 한 때 마음을 설레게 했던 상품의 현재를 보여준다며 쓰레기를 전시하기도 하였다. 썩은 생선을 미술관 측에서 철거 요청을 했고 쓰레기작품은 청소부가 진짜 쓰레기인줄 알고 치워버렸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쓰레기는 쓰레기로 취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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