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조영남, 팝아트
[앤디 워홀]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앤디 워홀이 쓰레기론 뒤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앤디워홀의 작품은 거의 쓰레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고 미묘한 아름다움과 불타는 예술혼 대신 너무 대중에게 아부하고 때론 대중을 속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앤디워홀은 팝아트의 선구자이다. 팝아트란 팝송처럼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세련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인 예술이다. 팝아트의 대표적 작가와 작품으로 앤디워홀의 마릴린 먼로 시리즈, 로이리히텐 슈타인의 만화그림 시리즈, 조영남의 화투그림 시리즈를 들 수 있다. 팝아트의 감상 방법은 의미를 캐지 말고 팝송을 듣듯이 편하게 즐기면 된다. 의미를 캐지 말라는 말은 김춘수의 무의미 시처럼 의미를 원천 봉쇄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무의미 시란 문장은 이루어지는데 의미가 성립되지 않도록 단어를 골라 단어 이미지와 소리의 충돌 또는 어울림에만 집중하게 하여 이런 무의미 시를 읽을 때 마치 시로 쓴 추상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앤디워홀의 마릴린 먼로 시리즈가 보여주는 여배우의 모습을 통해서 진짜 모습과의 차이를 의미한다거나, 입은 미소를 띄고 있지만 눈에는 슬픔을 담고 있다는 식의 의미를 부여하려하면 한참 동떨어진 해석이다. 마릴린 먼로 시리즈의 아름다움은 같은 얼굴을 반복하는데서 오는 아름다움과, 음영을 강조하는데서 오는 색 다름과, 같은 얼굴을 반복하면 지겨우므로 색깔을 바꾸는 변주미로 구분할 수 있다. 섹시한 백치미를 지닌 여배우의 이미지를 영화 스틸 사진 포스터(제일 유명한 것이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사진 일 것이다.)로 대량 생산하고 줄거리(색상)만 바꾼 영화를 만들어 대량 소비하는 현상을 마릴린 먼로 시리즈를 동원하여 비판하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앤디워홀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체재를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상품의 개성이 말살되는 것과, 할 수 없이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게 되는 노동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대량 생산 시스템에 찬성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앤디워홀은 대량 생산에 적합한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을 도입하여 그것도 조수를 시켜 대량 생산 상품 시리즈를 만들거나 마릴린 먼로 시리즈를 만들고 마오쩌뚱 시리즈를 만든 것을 보면 확실히 대량 생산 체재를 찬양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조수를 채용한 것을 보아도 설계자와 노동자의 분업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에 대량 생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실크스크린 기법은 평면에 반복적인 패턴의 무늬를 빨리 인쇄할 때 흔히 쓴 방법이다. 그 방법은 얇은 비단에 파라핀(양초성분) 같은 물감이 침투하지 못하는 약품을 바르고 무늬 부분만 약품을 제거한 후 물감을 롤러로 밀어 인쇄하는 수법이다. 단점은 한 가지 물감 밖에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색으로 인쇄된다는 점이다. 여러 색으로 인쇄하려면 원판을 여러 개 만들어 겹쳐 인쇄하는 방법 밖에 없다. 사진을 인쇄할 수도 있는데 천연색은 재현할 수 없다. 마릴린 먼로 시리즈의 색상이 단조로운 것은 이 단점 때문이다. 앤디워홀의 영리한 점은 대충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진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게 한 것이다. 자신은 재미있게 아이디어만 내고 귀찮은 후속 작업은 조수를 시켰다.
둘째. 마릴린 먼로 시리즈와 마오쩌뚱 시리즈를 제작할 때 얼굴로 주목도를 높이고 예쁜 여배우와 존경 받은 정치지도자, 마릴린 먼로와 마오쩌뚱(당시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부패한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 하였으며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한 마오쩌뚱을 존경하였다.)의 얼굴을 표현함으로서 주목도를 더 높이고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이 들게 하여 높은 작품 가격을 정당화 하려는 속셈이 있지 않았나 짐작한다. 실제로 상품 시리즈 보다 얼굴 시리즈가 더 비싸게 거래된다.
셋째, 대중성을 중시하는 오피니언 리더인 좌파지식인들에게 대중성을 표방하는 팝아트를 제작하여 그들에게 호평을 끌어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고학력의 부유층이 좌파일 확률이 높다. 이것은 기부문화가 활발한 미국 풍토와 세금인하에 반대하는 초부유층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대학교수가 대부분 좌파이기 때문이다. 주목 받지 못했던 노동자가 만든 공산품을 주제로 삼은 앤디워홀에 대한 고마움을 높은 작품가격으로 표현하게 된다. 장삿속에 밝은 앤디워홀은 이 모든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넷째, 얼굴시리즈에서 같은 얼굴이 반복되면서 최면에 걸리는 느낌이 든다. 한 얼굴만 있는 것 보다 여러 얼굴이 있으면 집단적 호소력이 생기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색상이 같은 얼굴이 반복되면 본인도 지겹고 성의가 없어 보이므로 색상을 바꾸었을 것이다. 미술 하는 사람은 타일을 붙이는 경우에도 상하좌우의 색상 조화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앤디워홀은 무작위로 색상을 맞춘 것 같아서 단순히 변덕을 부린 것처럼 보인다. 마릴린 먼로 시리즈를 전시할 때 두 줄 또는 네줄로 다닥다닥 붙여서 전시했는데 배색의 규칙성을 찾을 수 없어 다소 지저분하게 보인다. 방을 지저분하게 쓰는 사람은 창의성이 뛰어나다는 말이 있는데 앤디워홀은 창의성이 뛰어나든지 금방 싫증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색상을 바꾸는 것에서 기분은 바뀌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해이다. 심심해서 색상을 바꾼 것 뿐 인 데 거기에 심오한 의미가 깃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듯이 거기 아무것도 없고 반복미와 집단적 호소력과 변주미 또는 변주추가 있을 뿐이다. 의미에서 해방 된 점을 생각하면 앤디워홀의 작품은 가장 구체적인 사물로 표현한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물을 추상화 시킨 것은 카메라의 냉정한 시선과 반복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로이리히텐슈타인의 만화그림 시리즈는 바로 이해되고 오해할 여지도 없어서 팝아트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만화처럼 보이는 요소는 간결한 그림체와 말풍선과 스크린 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크린 톤까지 꼼꼼히 그린 로이리히테슈타인에게 존경심을 가진다.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으며 의미가 없고, 강한 정서적 호소력을 가지게 색상과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으므로 팝아트로 분류할 수 있다.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워홀이 조수를 썼기 때문에 조영남도 정당하다고 주장 하고 있는데 사진을 원판으로 한 판화와 그림은 사정이 다르다. 판화는 색상을 지정하는 게 전부인 반면에 그림은 창조성을 발휘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조영남이 스케치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상세히 설명하고 색깔 지정까지 했다면 그 그림은 조영남의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고, 조수에게 적절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선에서 판결 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조영남이 대충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알아서 그리라고 했다면 이 그림은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 되어 작품가의 절반을 나누라는 판결이 날 가능성이 크다. 작품마다 설명 수준이 달랐을 테니까 원칙대로 하자면 작품마다 판결을 해야 되겠지만 판사의 업무과다로 인해 조영남의 불성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7:3으로 판결할지도 모른다. 조영남과 팝아트의 성격은 가벼운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일치한다. 조영남의 재미만 추구하는 성격은 강제 입영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강제입영사건은 ‘신고산 타령’의 가사를 바꿔 부른데서 비롯하였는데 원래 가사는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 구고산 큰 애기 단봇짐만 싸누나’ 인데 가사의 의미는 구한말 서양의술 도입과 위생관념의 개선으로 함흥 남쪽 고산군 고산읍의 인구가 급격하게 불어나게 되고 고산 옆에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이 지역을 신고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고산 지역은 구 고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신고산과 함흥을 연결하는 버스노선이 일제강점기시대에 생기게 되자 구 고산 처녀가 무작정 가출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가사 내용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시대 초기에 생긴 신민요로 분류할 수 있는데 원곡은 후렴으로 봐서 어랑 타령에서 온 것 같다. ‘신고산이 와르르르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김현옥의 모가지가 왔다 갔다 하누나’ 라고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를 풍자했다. 이 풍자로 조영남이 괘씸죄로 강제입영 된 것이다. 김현옥은 당시 서울시장으로 추진력이 뛰어나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렸다.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시장에서 물러나 부산 북쪽의 고향 장안에서 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여생을 마쳤다. 공연 중에 일어난 헤프닝을 누가 신고했느냐 싶지만 공연장과 영화관에는 임검석이라는 경찰 전용좌석이 뒤에 마련되어 있었다. 임검석은 일제 강점기에 군중이 모이는 장소를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만든 것인데 해방 후에도 그 관행이 이어진 것이다. 조영남은 기본 훈련을 받은 후에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위문공연을 했는데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영남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원래 부르려고 한 ‘황성옛터’ 대신 ‘각설이 타령’을 불렀다. 조영남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재구성해 보면 박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콤플렉스 때문에 엔카를 싫어하고 평소 단소를 즐겨 불 정도로 국악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흥겨운 민요를 부르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부르려던 ‘황성옛터’는 일본 가수인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술인가 눈물인가’와 멜로디가 비슷하여 대통령이 싫어할 거라고 판단한 거 같다. 흥겨운 민요가 옹헤야도 있고 밀양아리랑도 있는데 하필 각설이 타령을 골라 곤욕을 치렀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네 선생이 누구신지 나보다도 잘헌다.’ 노래가 진행 될수록 처음에는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기도 하여 흥겨운 분위기였으나 점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가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조영남은 이 사건 때문에 영창 갈 뻔 했는데 서울대 출신 법무관들이 그 애는 순수하게 재미로 선곡한 것이지 정치풍자를 할 정도의 의식이 있는 친구가 아니라고 극구 변명을 해서 영창 가는 건 면하게 되었다. 조영남은 제대 후 결혼하고 각설이 타령 후유증으로 미국으로 쫓기듯이 건너가게 되었다. 미국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재미만 추구하는 버릇을 못 버리고 한 여자에게 싫증나자 다른 여자를 기웃거리는 바람기를 발휘하게 된다. 이런 조영남에게 가벼운 재미를 주는 팝아트는 전율에 가까운 공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평소 그림을 즐겨 그리던 조영남은 격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팝아트를 평생의 취미로 삼거나 직업으로 선택할 생각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던 소재를 찾는 것 이었다.
조영남은 화투를 소재로 선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화투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인이 즐겨하는 놀이이기 때문에 익숙하고 조금만 변형하여도 크게 주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트럼프카드보다 도상이 풍부하여 지루하지 않고 도상이 정형화되어 있어 스케치하고 색칠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기왕 정형화 된 김에 자신은 재미있게 아이디어만 내고 지루한 스케치와 색칠 작업은 조수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영남이 비난 받는 이유는 조수화가의 손길이 닿은 것을 밝히지 않았고 조수의 생활고에 무심하여 노동력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앤디워홀도 돈을 좋아하여 조수에게 통상적 임금만 지급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앤디워홀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는 캠벨스프통조림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상점에 진열 된 통조림을 판화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의 성공은 포드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과 태일러의 대량생산에 가장 적합한 동작 연구를 통한 대량생산시스템 완비로 대중이 반복미에 눈뜨게 된 덕분일 것이다.
TV 경제뉴스에서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는 야적장에 빼곡이 줄지어 있는 자동차를 보거나 식품관련 뉴스에서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는 켄베이어 벨트에서 줄지어 이동하는 통조림을 볼 때 미국인이라면 미국의 풍요에 대한 자부심을 갖거나 반복미에 대한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마침 미스반데어로 대류의 합리적인 건축바람이 불면서 규격화 된 창호를 갖춘 고층 건물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반복미에 더 눈을 뜨게 되었다.
앤디워홀은 예술가의 예민한 촉각으로 이런 추세를 감지하고 그것도 대량생산에 적합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동원하여 미국의 풍요와 반복미를 돋보이게 하는 상품시리즈와 얼굴시리즈를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실크스크린기법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사진을 베낄 수 있기 때문에 귀찮은 작업을 덜 수 있고 아마 직물 공장에 관한 뉴스자료화면에서 실크스크린기법으로 직물에 무늬를 척척 찍는 장면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짐작한다.
앤디워홀의 상품시리즈와 얼굴시리즈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미니멀 음악일 것이다. 미니멀음악은 반복되는 음형이 서서히 변화하는 음악으로 최면에 걸리는 듯한 느낌도 들고 몽환적인 느낌도 들고 한참 듣다 보면 명상적인 느낌까지 드는 음악이다. 앤디워홀의 얼굴시리즈는 미니멀음악의 반복과 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미니멀음악은 오늘날 뉴에이지음악으로 변화하는데 조상은 라벨의 볼레로라고 할 수 있다. 볼레로는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면서 오케스트라 편성을 조금씩 늘려 클라이막스에 도달시키는 음악인데, 미니멀음악은 볼레로 같은 클래식과 재즈와 팝을 섞어 멜로디가 서서히 변하게 만든 클라이막스가 없는 음악이다. 앤디워홀의 얼굴시리즈는 대량생산시대의 반복미와 시각적 충격과 미니멀음악의 청각적 충격과 앤디워홀의 계산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미니멀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는 스티브 라이히와 필립글래스를 들 수 있고 뉴에이지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는 조지 윈스턴과 영화 피아노의 OST를 담당한 마이클니만을 들 수 있다. 한동안 기독교 측에서 뉴에이지음악 배척운동을 벌인 적인 있는데 그 이유는 반복적인 멜로디가 최면을 거는 듯하고 명상적 분위기가 힌두교나 불교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부흥회에서 열정적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최면을 걸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예수님도 명상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려 하는 영지주의 파에 속했으며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통해 타종교에 대한 포용성을 보여 주었고 무엇보다 증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므로 요즘은 뉴에이지음악 배척 운동이 수그러든 것 같다. 사마리아인은 아마도 무슬림일 것이다.
락 밴드 롤링 스톤즈는 앤디워홀에게 앨범 자켓 디자인을 의뢰한 적이 있다. 앤디워홀은 롤링 스톤즈의 섹시함을 강조하기 위해 청바지감과 지퍼를 이용하여 사타구니에서 허리까지 청바지 입은 모습을 재현했다. 물론 지퍼는 내릴 수 있게 디자인 했다. 누구나 롤링스톤즈 멤버 중에 제일 옷맵시가 섹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알고 보니 조수의 청바지 입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앤디워홀은 애초부터 진실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롤링 스톤즈 하니 생각나는 게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이 떠오른다. 머리를 빨리 굴려야 머리에 녹이 슬지 않는다는 식으로 구르는 돌에 좋은 의미를 두는 한국인이 많은 것 같다. 이 속담의 뜻은 직업을 자주 바꾸면 재산이 안 모인다는 뜻으로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다운 속담이다. 롤링 스톤즈라는 이름에는 재산을 못 모으더라도 음악적 고집을 지키겠다는 저항의 의미가 담겨있다.
한국에서 잘못 쓰이는 대표적 격언으로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이다. 원문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깃들게 하라’고 그리스 철학자가 탄식하며 한 말이다. 고대 올림픽 때 운동선수가 공부는 안하고 운동만 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이 말은 ‘운동선수들이여 운동만 하지 말고 공부 좀 해라’는 잔소리로 볼 수 있다. 앤디워홀의 얼굴시리즈의 메타비평으로 필립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이나 지코의 ‘너는 나, 나는 너’ 뮤직비디오를 들 수 있다. 필립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앤디워홀의 얼굴시리즈 영향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 틀림없다. 그 근거는 클라이막스가 없으며 반복미와 변주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앤디워홀의 얼굴시리즈를 전시할 때 필립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을 연주한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것이다. 지코의 ‘너는 나, 나는 너’ 뮤직비디오는 눈두덩이가 닮은 두 남녀의 미묘한 감정교류를 다루고 있는데 얼굴시리즈는 한 얼굴의 여러 모습을 다루는데 비해 이 뮤직비디오는 두 남녀의 여러 모습을 다루는 게 대조적이다. 조명과 컴퓨터그래픽으로 얼굴 색상을 바꾸는 것은 얼굴시리즈와 비슷하고 같은 얼굴을 반복하여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과 경쾌한 춤으로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대조된다. 팝아트와 케이팝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