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통제미/자연미
[잭슨 폴록]
JTbc 프로그램 중에 ‘학교에 왔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연예인의 학교 체험프로그램이었다. 모 예고에 강남과 조영남이 출연한 적이 있다. 그 학교 미술 시간에 음악을 틀고 한지에 자유연상그림을 그리는 수업을 진행했다. 테크노음악이 나오자 강남은 검은 물감으로 정사각형을 겹쳐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 테크노음악은 네 박자의 댄스 음악이었을 것이다. 테크노음악의 시조는 독일의 그룹 크라프트 베르크인데 라디오 액티비티(방사능) 옴스위트 옴(홈스위트 홈을 패러디한 곡으로 전자문명에 편안함을 느끼는 젊은이를 비판한 곡이다. 옴은 전압, 전류, 저항의 비례, 반비례 관계를 밝힌 옴의 법칙에서 유례했다.) 같은 곡을 발표하여 현대문명을 비판했는데 요즘 테크노음악은 전자음향을 동원한 댄스음악 위주여서 입맛이 씁쓸하다.
마지막으로 튼 곡은 모차르트가 마지막에 작곡한 곡으로 레퀴엠 중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작곡한 ‘눈물의 날’이었다. 강남은 영혼이 떠나가게 슬픈 곡이라는 촌평과 함께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색을 뿌려 번지게 하고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색을 뿌려 번지게 하였다. 조영남은 강남이 잭슨 폴록의 뿌리기 기법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감탄했지만 잭슨 폴록의 뿌리기 기법은 번지지 않는 물감을 사용하는데 비해 강남은 한지와 번지는 물감을 사용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번지는 과정은 통제할 수 없으므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상징한다. 강남은 이 곡이 모차르트의 마지막 곡이라는 걸 의식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술가의 촉으로 죽음을 감지했던 것 같다.
잭슨 폴록의 뿌린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안 좋아했다. 추상무늬벽지 같아서이다.
우연히 미국현대미술에 대한 다큐멘트리를 보다가 잭슨폴록이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뿌리기 작업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뿌리기 작업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자연적 요소가 추가되게 된다. 저렇게 진지하게 작업하는 것을 보고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뿌리는 작업에서 첨가되는 동양적 자연미와 번지지 않는 물감을 사용하는 서양적 통제미가 융합한 최초의 작품이다. 헤브라이즘과 헬리니즘의 융합으로 화면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고해졌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뿌리는 작업으로 그 강고한 문화적 전통을 일시에 깨어버린 것이다. 잭슨 폴록 작품의 자연미를 평가한다면 부산에서 제주로 가는 배에서 물결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항구 안에서 물결의 패턴은 마치 모네의 ‘해 뜨는 인상’에 나오는 물결을 닮았고, 난 바다로 나서자 큰 물결과 중간 물결과 잔물결이 복합되어 치는데 잭슨 폴록의 작품은 잔물결 수준의 자연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잭슨 폴록은 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번지는 기법을 쓸 수 없고 화면을 통제하는 서양적 전통이 깨어졌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여 평론가도 잔물결을 벗어나 중간 물결, 큰 물결로 발전시키라는 조언을 할 사람도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게 뿌리는 색상을 바꾸는 것 뿐 이었고 한참 뒤에 나오는 개념인 프랙탈 적인 자연미를 첨가하라는 충고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화면을 통제하려는 서양적 미술의 전통과 뿌리기 기법 사이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잭슨 폴록의 대표작인 ‘보라 빛 서정’을 전시할 때 메타비평으로 한지의 물성을 이용하여 번지는 기법을 사용한 서정적인 풍경화나 추상화를 전시하고 싶다. 보라 빛의 서정적인 효과와 먹의 깊은 색감을 비교하고 뿌리기 기법의 자연미와 번지는 기법의 자연미를 비교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