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
[존 케이지]
존 케이지의 작품 중에 마차 뒷문을 열고 두 줄을 갈라지게 늘어뜨리게 하고 중간 중간에 상자들을 연결한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무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가 단어 이미지의 충돌과 조화를 통해 예술적 인상을 주는 것처럼 오브제 이미지의 충돌과 조화를 통해 예술적 인상을 주는 것이다. 마차의 이동성과 상자의 고정성이 충돌하고 줄의 가늘고 긴 이미지와 상자의 투박한 이미지와 충돌하고, 상자의 반복을 통한 조화가 예술적 인상을 주는 것이다. 또 케이지의 대표작 ‘4분 33초’처럼 미술관의 소음도 예술의 일환으로 여기든지 감상자의 당혹감도 예술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4분 33초’ 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말없이 퇴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음도 예술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사람들에게 ‘4분 33초’ 동안 명상적 침묵을 선물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한다.
‘4분 33초’는 흔히 연주하는 피아노 소품의 평균 연주시간이든지 우연히 존 케이지가 연주한 피아노 음악의 연주시간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 음악은 악장 구분이 있다. 1악장은 33초의 시간으로 구분 되어 있는데 어차피 악장 구분은 의미가 없지만 33초는 연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인내가 바닥나는 시간으로 추정한 게 아닌가 짐작한다.
둘째는 마차가 이동한 길을 두 줄이 상징한다고 볼 때 한 줄은 경험한 길로 볼 수 있고 다른 한 줄은 프루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가지 않은 길로 해석할 수 있다. 상자는 경험한 각종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개인마다 사건이 다르고 남에게 말 못할 사연도 있으므로 상자로 뭉뚱그린 것 같다. 사건을 회상할 때 한 사건이 끝나면 중간에 시간의 흐름은 생략되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게 되므로 상자를 띄엄띄엄 연결할 수밖에 없다. 다른 줄은 가지 않은 길과 사건들을 상징하는데 줄이 좌우대칭인 것은 가지 않은 길로 가 봐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이 작품의 메타비평으로 마차의 마부석에 마부인형을 앉히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 맨 다음에 관자놀이 부분에 두 줄을 묶어 앞으로 늘어뜨리고 상자를 중간 중간에 엮은 것을 제시하고 싶다. 관자놀이에 묶은 두 줄은 앞으로 예상하는 경로를 뜻한다. 예측하는 경험이 똑같지는 않으므로 좌우가 비대칭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