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민 Sep 25. 2022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아

단점인 줄만 알고 지냈던 선택이 결국엔 내게 꼭 맞는 길임을 깨달았다


이사를 준비하며 잊고 있던 작은 박스들을 찾았다. 몇 년에 한 번 열어보면서도 항상 버릴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하는 박스들. 그 속엔 오래된 명화 엽서가 있었다. 스물셋, 미술에 빠져선 세계의 유명하다는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차곡차곡 모았던 엽서였다.


다른 박스 속엔 몇 년 치의 영화 팸플릿도 있었다. 스물여섯엔 영화에 빠져 한 달에 20일 넘게 영화관을 찾았다. 또 다른 박스엔 폴라로이드 사진들과 필름이 수북했다. 덕분에 원룸에서 30박스가 넘는 짐이 나왔다. 기사님은 이 정도면 일반 투 룸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세상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서 제자리에 붙어있는 법이 잘 없었다. 이것도 재밌고, 저것도 재밌는걸.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아이에겐 항상 따라붙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끈기가 없네’란 말이었다. 잘 모르는 어른들은 나를 두고 그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살다 보면 재밌는 것만 할 수 없다고, 어떻게 딱 시키는 일만 하고 끝내냐고. 그러니 너는 열정도, 참을성이 없는 거라고. 엄마 아빠를 제외한 어른들은 종종 어깨너머로 학교에서 학원에서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스스로도 끈기가 없는 애라고 생각하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피아노를 그만 두면서였다. 동생은 나보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나를 재끼고 실력이 쑥쑥 늘어 체르니 40번을 쳤다. 반대로 나는 연습도 대충, 달걀 쥔 손처럼 하라는데도 대충. 40번을 겨우 넘어오긴 했는데 재미가 없어선 정말 하라는 연습만 딱하고 끝냈다. 그러니 실력이 늘 리가.


그런 나를 보고 피아노 선생님도 ‘너는 끈기가 없다고’ 정색하며 말했다. 동생의 열심과 꼬치꼬치 비교하면서. 이제 와 돌아보면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애에게 어른이 할 말은 아니었다만 그 말은 오래 내게 뾰족하게 남았다. 물론 나도 참고만 있진 않았다. ‘저는 끈기가 없는 게 아니고요, 좋아하는 건 잘해요.’ 그럼 선생님은 어디 꼬박꼬박 말대꾸냐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고도 나는 2년 더 피아노를 쳤다)


자라면서도 타고 난 성향이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엔 재밌는 게 많아선 시선을 빼앗는 것들 가까이에 가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등교를 할 때도 상점을 기웃기웃하느라 발걸음이 느려졌고, 대학 때도 학기마다 대외활동을 두어 개씩 했다. 연락하고 지내는 대학 동기가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땐 혼자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면서 펑펑 우는 게, 미술관에 가서 가만히 그림 속 붓 터치를 살피는 게, 방에 앉아 대외활동 콘텐츠를 만드는 게, 밤새 술집에서 누가 누구랑 사귀었다가 헤어졌니, 걔는 고백을 했니 차였니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것보다 더 즐거웠으니까.


좋아하는 걸 하며 즐거우면서도 대학 동기들 사이에, 끈기 있게 무언가를 계속 해내는 사람들 사이에, 그러니까 주류처럼 보이는 쟤네 사이에 끼지 못한다는 불안함이 항상 있었다. 무리 사이에 끼지 못하는 걸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했어'라는 멋진 명분이라 여기지 못하고, 때론 그들 사이에서 낙오가 되었다는 애매한 박탈감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그 불안함은 ‘너는 끈기가 없어’라던 피아노 선생님의 말처럼 내가 어딘가 잘못된 사람인 것 같은 낙인처럼 느껴져선 재미는 언제나 불편함과 함께 왔다.



오래 붙잡고 있던 자잘한 불편함을 툭 끊어 버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회사 선배들의 말 덕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여전히 캠핑도 다니고 자전거도 타고 유튜브를 하는 걸 보며 선배들이 그랬다. ‘너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참 잘해. 꾸준히 무언가를 좋아하고 결과를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너는 아마 우리 중에 가장 오래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사람일 거야’ 평소와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회사 얘기, 휴가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사소한 대화였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그 순간 오래 쥐고 있던 불안이 탁 잘려 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끈기가 없던 게 아니었구나. 그냥 그 일들이 나랑 맞지 않았을 뿐이었구나. 좋아하는 것들 앞에선 나도 꾸준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선배들의 말로 인해 지난 삶이 재정리되는 것 같았다 할까. ‘끈기가 없는’ 사람에서 ‘꾸준히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발견하는’ 사람으로. '낙오'된 사람이 아니라 나만의 방향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숨은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단점인 줄만 알고 지냈던 나의 선택이 결국엔 내게 꼭 맞는 길임을 깨달았던 날. 나는 집에 돌아와 선배가 해준 말들을 종이에 옮겨 적곤 아래에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아. 그건 끈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좋아하는 게 많다는 뜻이야.' 그리곤 작은 박스를 만들어 넣어 두었다.




written by 청민 │ 2022.05.28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꼭 완독하지 않아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