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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Jan 06. 2022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십쇼

당신의 상여금으로요


나와 동갑인 누군가가 상여금 n00%를 받는다는 이야길 들었다. 기본 연봉도 나보다 훨씬 높았지만, 연간 상여금을 포함한 연봉은 내 연봉의 2.5배를 훌쩍 넘었다.


여러모로 내가 맡아 할 일이 아닌 일들을 어찌저찌 맡아서 하던 중이었다. 최소한 경력 5년 이상 팀장 이상급이 맡아서 할 일들. 주변에서 그걸 네가 왜/어떻게 널 시켜, 라고 말하는 일들. 그런데도 못하겠습니다, 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고 어찌저찌 해내야만 하는 일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악물고 각종 레퍼런스 찾아가며 겨우 겨우 해볼 수는 있는 일들. 그런데 어쨌거나 내 급여를 결정할 사람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 일들.


하필이면 가장 억울하고 힘든 순간에 그 얘기를 들어서, 정말 오랜만에 인생에 대한 현타가 왔다. 나는 나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인데, 이 회사는 이 회사고 그 회사는 그 회사인데. 아는데. 열등감보다는 차라리 박탈감에 가까운 감정에 급작스레 휩싸여서,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 이야기를 해준 동료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기업 공채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올해가 신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의 마지노선인 것 같다고. 신입으로 들어가도 경력 n년차인 지금 받고 있는 연봉보다 잘 받을 거라고, 그러니 이제라도 너도 공채를 준비해보라고.


자조할 새도 없이 밀려드는 업무에 무력감이고 자시고 잊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정말 그 돈을 받기 위해 대기업 입사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정답은 '아니다'였다. 능력이나 열정 때문은 아니었다(실제 내 능력치와는 별개로).


직장 생활 3년 간 많은 일을 해봤다. 그래서 꼼꼼하고 끈질기고 어쩌고 저쩌고 한 성격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에 꽤 잘 맞는다는 것도 안다. 주변 사람들도 이 업무가 잘 맞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별로 재미가 없다. 일을 쳐내는 재미도 있고, 이것저것 숫자 계산하며 전략 세우는 재미도 있는데, 업무 시간 외에 관련 뉴스와 이슈를 체크하고 싶지는 않다. 딱 나에게 주어진 업무 시간 안에서, 그 정보 안에서만 놀고 싶다.


뭔가를 오래 좋아하는 걸 못하는 나에게도 유일하게 한 가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있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그 분야를 공부하며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몇 년 후에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분야라면 평생 몸담아 (적당히 재밌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수 년간의 공부를 끝마치고 일을 시작해도 대기업 다니는 사람만큼의 연봉을 벌기는 어렵다. 나는 수 년 동안 수천만 원을 까먹을 거고, 그들은 수 년 동안 수억 원을 벌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가는 건 안될 것 같다. 누군가는 대기업 합격할 자신이 없으니 도피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그럴 수도 있죠),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걱정과 불안과 아쉬움 속에 살 것 같다.


게다가 사람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기 때문에, 내가 지금보다 돈을 많이 벌게 됐다고 해서 지금보다 만족스러울 거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지금처럼 쥐꼬리만 한 내 월급을 보며 욕지거리가 나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돈 욕심 다 쓸 데 없으니 그냥 발이나 씻고 공부나 하자는 게 내 결론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글렀는 걸. 그러니까 길고 긴 이 글은 돈보다 하고 싶은 일을 택하는 게 맞다는 자기합리화의 도출 과정인 거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우는 소리 하고 진짜 끝내야겠다. 그 성과금, 2년치 대학원 등록금이랑 맞먹는 금액이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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