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수변공원에는 두 개의 달이 뜬다
지금 나는 삼필산 둘레길 중턱에서 일생일대의 고민에 서 있다.
“저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고요 속의 외침. 금요일 밤 저녁 산행엔 동행인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러던 사이 뜻밖에도 강풍과 만났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남은 길을 계속 갈 것인가, 왔던 길로 되돌아 갈 것인가’
오늘의 산행에는 목적이 있었다. 며칠 전 삼필산 둘레길에서 봤던 반딧불이가 또 보고 싶은 그리움의 발걸음이었다. 잠시 반딧불이와 함께 그 산을 흘러 다닌 기억을 잊지 못했다. 4월 초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 옷 입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가벼운 산행에 날씨까지 정성스레 챙겨볼 여유가 없었는데 출발하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온이 더 떨어져 잰걸음을 해본다.
삼필산 둘레길 앞으로는 월광수변공원이 펼쳐져 있다. 공원 안쪽 수밭마을에는 100여 개의 밥집과 맛집이 모여있는데 숲이 밭을 이룬다는 뜻의 숲밭이 수밭이 되어 수밭마을이라 한단다. 작년 백종원이 왔다 간 ‘할매묵집’이 있는 곳이다. 앉은자리에서 밥상을 펼치고 묵채와 정구지(*부추의 경상방언) 부침개를 먹는 것이 독특하다고 요즘엔 웨이팅도 꽤 길다. 월광수변공원에 다다르니 점점 더 신이 난다. 곧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속도가 빨라진다.
▲둘레길 초입 경사가 가파른 깔딱고개
드디어 둘레길 초입이다. 오를 길을 살펴보니 시작부터 고비다. 운동화 끈을 꽉 조여 매고 가파른 깔딱고개를 쉬지 않고 올라 본다. 10분쯤 지났을까. 숨이 딱 넘어갈 때쯤 오른편으로 초록의 영롱한 빛이 펼쳐진다. 눈앞에 반딧불이다. 수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저마다 뿜어내는 신비로운 빛 가운데 발이 저절로 멈춘다. 머리 위로 초록의 낭만이, 초록의 황홀경이 펼쳐진다. 산 속 저 멀리까지 넓게 넓게 퍼져있는 반딧불이와 함께 놀다 쉬다 하다 보면 평평한 길이 나온다.
산행에서 또 보고 싶었던 것이 반딧불이만은 아니다. 조금 더 걸으면 지름 2.5m의 보름달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다. ‘쌍월’ 월광수변공원에는 두 개의 달이 뜬다. 하나는 산 중턱에 걸터앉았고, 하나는 두둥실 하늘에 떠올랐다. 달이 빛나는 공원 ‘月光’에 딱 맞는 달 조형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산 중턱에 걸터앉은 달 조형물
산이 높아질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산행 길옆으로 서 있는 나무의 가지들도 이리저리 부딪히느라 정신이 없다. 바람 소리가 거칠어지니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 고민이 시작된다. ‘돌아가야 하나?’ 아직 흔들다리까지도 못 갔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다. “저기요, 거기 누구 있어요?” 어딘가에 혹시 몰랐던 동행인이 있을까 소리를 던져본다. ‘돌아가야 하나?’, ‘아니 돌아가야 하는 건가?’ 그런데 바로 그때, 저쪽 반대편에서 오고 있던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그냥 가도 괜찮아요”
허공에 던진 말일 줄 알았는데 시차를 두고 돌아온 답변이다. 툭 하니 내뱉어진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번진다. 온몸에 휘몰아치던 바람 때문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발가락마저도 꼼지락꼼지락 용기가 생긴다. 다시 걸어본다. 같은 바람이 아까보다 약하게 느껴진다. 바람결에 몸을 맡겨보니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등산로의 난간 너머로 내가 지나온 풍경이 보인다. 이토록 아름다운데. 앞만 보고 걸었다면 못 봤을 풍경이 그냥 거기에 펼쳐져 있다.
만평이 넘는 도원지와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 발 한 발 내디뎌 본다.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내가 있는 곳에 따라 바람도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고도가 높아지니 바람도 강해진다. 산세가 가파를수록 바람이 거세다. 사는 것도 매한가지 아닌가. 삶의 골이 깊어질수록 삶의 표면도 거칠더라.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삼필봉의 고도는 465.2m. 내 인생의 고도는 지금 어디쯤인가. 중간에 멈췄다면 머무르는 곳마다 바람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도 몰랐을 테지. 바람의 뒷모습을 본 적 있는가. 바람은 가기만 할 뿐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따뜻한 곳으로부터 차가운 곳으로 옮겨가는 대기의 이동일 뿐. 이제 바람을 만나면 반가움이 앞설 테지. 바람을 이기는 법은 필요하지 않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바람을 타고 등산로 초입으로 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고요하다. 오르지 않았다면 평온하고 안전했을 테지만 산에 올랐기에 바람을 만났고 내려와서도 잔잔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1,200m래. 너무 힘들겠는데. 그냥 가자” 오르기도 전에 왔던 길로 돌아가는 커플을 보니 ‘그냥 가도 괜찮아요’가 혀끝에서 맴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래, 다들 각자의 길이 있는 법. 그 길에서 각자 모두의 몫을 해내는 법.
나도 다음 길의 시작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