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땅 싸가도 문제없다. 하지만 가벼워서 손해 볼 건 없다.
짐이 많으면 여행이 무거워진다. 중고로 물건을 사본적은 있어도 팔아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나는, 매번 '혹시나'하는 마음에 물건 박스를 버리지 못한다. 박스가 있어야 팔 때 값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짐을 싸다 보면 매번 실패다. 그래서 우리 집 여행 짐은 전문가인 아내 몫이다. 써놓고 보니 짐싸기 싫어서 핑계 대는 야비함을 들킨 것 같아 살짝 부끄럽다.
앞서도 말했듯이 캠핑카 여행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짐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집에서 출발해서 캠핑카에 싣는 순간까지, 그리고 다시 캠핑카에서 내려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만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여유 있게 챙겨 갈 수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가면서 헤어 드라이기를 챙겨갔다가 후회(?)했다는 어떤 여자분 글을 읽었는데... 헤어 드라이기뿐 아니라 파마 기계를 챙겨가도 문제 될 게 없다. 거대한 트렁크 공간에 때려 넣으면 끝이다. 그래서 우리도 느슨한 마음으로 짐을 챙겼다.
우리 동네(남인도 티루바난따뿌람)에는 두 계절만 있다. 덥거나, 졸라 덥거나. 여기서 몇 년 눌러살다 보니 쌀쌀한 날씨에 입을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다. 파는 곳이 없으니 살 수도 없다. 양말 신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춘추복은 불필요 아이템이다. 그래서 옷은 일단 현지에 가서 상황 봐가며 사기로 했다. 이불도 전부 홑겹 얇은 것뿐이라 침대에 깔만한 시트류만 좀 챙겼다. 두툼한 덮는 이불과 베개도 옷가지와 마찬가지로 현지에서 사기로 결정했다.
꼭 필요한데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유럽 현지에서도 구할 수 없는 물건도 있었는데, 바로 전기장판이다. 우리는 4~5월에 여행을 했는데,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4월 중순에 들렀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선 며칠씩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이런 날씨엔 전기장판이 정말 딱이다. 캠핑카에 LPG를 이용한 히터가 있지만 한국 사람은 아무래도 바닥이 뜨끈해야 좋다. 유럽이 워낙 넓다 보니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 여름을 제외하곤 밤에는 제법 쌀쌀하다. 그래서 이건 한국에서 택배로 받아서 싸들고 갔다. 인터넷에 2~3만 원 대의 전기장판 천지다. 품질도 만듦새도 제법 괜찮다. 그 밖에도 차량용 스마트폰 거치대, 시가잭 USB 충전기, 여행용 멀티 전기 어댑터, 6구짜리 멀티탭 등도 준비했는데 이런 물건들도 현지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미리 구해가면 좋고, 깜빡 잊었다면 현지에서 사면된다.
다른 준비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밥 해먹을 준비다. 우선 밝히자면, 우리 가족은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 별로 안 까다롭다. 인도에서도 한식 위주로 밥을 해 먹긴 하지만, 가끔은 인도식 백반이 당길 정도로 현지화됐다. 식성이 나름 국제적이다. 한식 안 먹고도 어느 정도는 버틸 맷집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여행 기간이 길어지니까 한국 음식 생각이 간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 힘이 난다.
우리가 여행했던 도시 중에 프랑크푸르트, 뮌헨, 프라하, 로마, 파리, 런던 등 대도시에는 모두 한인마트가 있었다. 구글맵에서 '한국 식료품점(Korean Grocery Store)'이라고 치면 다 나온다. 도시마다 차이는 있지만 라면이나 김치는 물론 한국 과자들도 종류가 제법 다양하고, 냉동/냉장 식품도 좀 있다. 심지어 냉동 만두도 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없는 거 빼곤 다 있다. 가격이 한국보다 약간 비싸지만 물 건너온 거 생각하면 아주 못 참아줄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굳이 다 사갈 필요가 없다. 처음 며칠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반찬류와 양념류만 챙겨가도 현지에서 충분히 잘 먹고살 수 있다. 물론 바리바리 다 싸들고 가서 여행 내내 한국에서보다 더 잘 먹겠다고 한다면, 그것도 말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아예 한국 식품을 구할 수 없는 동네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것들만 챙겨 갔지만, 먹을 것 넘쳐나는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경우라면 힘껏 챙겨가는 것도 비용을 쪼~끔 아끼는 방법이다. 한국 고유 식재료 외의 보편적인 아이템들은 현지 대형 슈퍼마켓과 마트에 넘쳐난다. 가격도 착하다. 고기 구하기 힘든 인도 살다가 유럽 가서는 매일매일 고기 파티하느라 정신없었다. 덕분에 그 빡빡한 일정을 이겨내고 돌아왔음에도 오히려 살이 쪘다.
인도 현지에서 구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나름 조심스레 짐을 싸긴 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됐다.
그나마 아내와 아이들 백팩 3개는 사진에서 빠졌다. 사진을 찍어 페북에 올렸더니 다들 이민 가냐고 묻는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실패(?)의 원인을 굳이 꼽자면 마음의 느슨함이 1등이다. 캠핑카의 넉넉한 공간을 생각하며 한껏 풀어진 마음이 참사를 불러왔다. 캠핑카에 싣고 다닐 생각만 했지, 거기까지 가지고 가고 도로 가지고 올 생각은 못한 안일함의 대가다. 바람 때문에 치지도 못할 배드민턴 세트를 챙기고, 가서 단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책들을 잔뜩 챙겨간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연재를 마무리할 때쯤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캠핑카를 반납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제법 시간을 요한다. 특히 자기 집 거실에서 여유 있게 가방 펼쳐놓고 짐 쌀 때와는 달리 캠핑카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짐을 싸려면 상당한 시간, 요령 그리고 인내가 필수다.
자! 그래서 결론은? 몽땅 싸가도 문제없다. 하지만 짐이 가벼워서 손해 볼 건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적당히 싸가면 된다. 그리고 깜빡 잊었다면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 어디 가나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매번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제 진짜 비행기 타고 유럽으로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