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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뮤즈 Jan 12. 2019

내가 중국공항에 갇혔을 때 -1-

#인생, 별 거 없(지 않을까?)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이 말들이 내게 그 어느 때보다 피부 깊-숙히 느껴진 때가 있었다. 


2017년 겨울. 

유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미국을 입국할 때 학생비자가 여권에 꼭 붙어있어야 하는 신분인데 그 학생비자는 갱신하기 전의 구여권에 붙어있었고 나는 신여권만 들고 쫄래쫄래 한국에 왔었더랬다. 이 사실을 무려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러 인천공항에 돌아갔을 때 알았고.. 티켓팅을 하면서 직원분께서 "학생 비자 보여주세요." 하는 순간 내 기준, 모든 시공간이 멈췄었다고 할 수 있겠다. 힘들게 모든 짐을 싸고서 인천에 갔다가 충격과 공포만 안고 충청남도로 다시 내려왔다. 예매한 비행기를 놓쳐 야만 하니 아까운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학교가 며칠 뒤 바로 시작할 텐데 첫 수업들을 놓쳐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버릴 수밖에 없었던 미국행 비행기는 50%로 나마 항공사 크레딧으로 받았고, 미리 연락을 보냈던 교수님들로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답변들이 바로 왔으며 천사 하우스메이트가 학생비자가 있는 여권을 내 친구에게 전달해주고 그 친구는 가장 빠른 Fedex 우편으로 내게 부쳐주었다. (글을 쓰다 보니 다시금 엄청난 고마움이 밀려온다.. 오랜만에 연락해봐야겠다.)


정신을 똑바로 붙들고 살자는 새해 다짐과 함께 나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중국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50% 날린 기존 티켓에 대한 반성의 마음으로 직항 티켓 말고 경유 티켓을 구매한 거였다. 그리고 나는 이 선택이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갈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날, 내가 타려던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5시간 지연, 연착되었다. 눈이 오는, 비행기가 뜨기에 좋지 않은 기상상태가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늘 그렇듯, 한 시간 정도 지연된다고 방송이 나왔다. 눈이 펑펑 오는 것도 아니었고 눈으로 보기엔 비가 온 것처럼 느껴지는, 그 정도의 상태였기에 한 시간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세 시간을 찍게 되었을 때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베이징까지 1시간 20분이 걸리는데 베이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이동하기에 시간이 촉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걱정이 민망해질 정도로, 비행기는 네 시간이 지났을 때에도 출발할 기미가 없었다. 포기했다. 나처럼 중국을 경유해서 미국 혹은 캐나다로 가는 계획이었던 분들은 항공사 직원분들께 거세게 항의하시기 시작했다. 중국 쪽에 연락을 해놓고 이러는 거느냐고. 항공사 직원분들은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다며 죄송하다는 말씀만 하셨다. "내려서 상황 닥치는 대로 해결해보자"라고 마음 편하게 (?) 먹는 게 그 상황에서는 답이었다. 


중국에 내렸을 때는 밤 10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공항은 텅텅 비어있었고 불들도 꺼져있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내가 탄 항공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귀찮은 사람이 걸렸다는 듯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한국사람들이 몰려와서 통역을 해주며 그분들의 사정까지 이야기하니 그제야 내게 제2터미널로 옮겨간 후 그쪽 사무실 매니저에게 이야기하라고 일러주었다. 10살 이후로 처음으로 간 베이징 공항이었다. 참 넓었고 영어가 생각보다 많이 보이지 않았다. 마땅한 안내가 보이지 않기에 베이징 공항 제2터미널로 넘어가려는 법을 검색해보기 위해 구글을 켰는데, 아뿔싸.. 와이파이도 안될뿐더러 구글 자체가 중국에서는 접속이 되지 않는다. 고구마 100개를 한 번에 먹은 듯한 마음을 날숨과 함께 뱉어버리고 기나긴 줄을 기다려 중국공항 직원분에게서 안내를 받았다. 사실 이 과정 속에는 나의 상황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그 못지않은 막중한 책임감까지 있었다. 같은 비행기에 탔던, 영어를 할 줄 모르시는 어르신분들을 내가 함께 챙겨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책임감과 함께 따라왔던 뿌듯함으로 상황을 이겨냈던 듯하다. 


그렇게 함께, 한 마음으로 항공사 사무실에 찾아갔다. 미국으로 가야 하는 나 같은 경우에는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고 캐나다로 가시는 분들은 바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야 하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는데 한 시간 뒤에 떠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의 잔여좌석은 네 자리뿐이었다. 어르신 세 분은 함께 캐나다 패키지여행을 하러 떠나는, 청년들보다 더 청춘 같은 분들이었고. 어머님 한 분은 캐나다로 유학 가 있는 자녀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마지막 한 명은 휴가 같지 않은 이틀 휴가를 준비했던 모델 언니였다. 내가 그분들께 자리가 한 자리 모자라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의 그 언니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어르신분들은 다행이라며 세 분이서 손을 맞잡으셨고 어머님께서는 "아유, 김치가 상하면 안될 텐데.."라는 말씀만 하실 뿐이었다. 


제2 터미널로 오는 길에서 모델 언니는 내게 이 여행의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서로 바쁜 와중에 너무나도 보고 싶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비행기 티켓을 산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 1박 2일을 생각하며 지난 3개월을 버텨왔다고 했다. 미국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신분이었기에 행여나 오해를 살까 싶어, 차선책으로 캐나다행을 선택한 거였다고. 근데 캐나다행은 직항이 많지 않아 단순하게 경유를 고른 것인데 이게 이렇게 큰일이 될 줄은 몰랐다고, 너무 무섭고 잃어버리게 되는 시간들이 아깝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친구를 단 3시간만이라도 보고 돌아올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며 설레는 웃음을 덧붙여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던 언니는 좌석 수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환하게 웃으며 어서 어른분들 여권 받아서 도와드리라고 했다. 

"아휴, 오랜만에 바람 좀 제대로 쐬고 충전 좀 하려고 했었는데 너무 아쉽네요 호호. 하지만 어르신분들은 안전하게, 오늘 내로 가실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함께 청춘 같은 기억 잘 남기시고! 아 또, 1년 만에 보는 아드님과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좋은 추억 남기시고 오세요."


1시간 뒤의 비행기를 타게 된 네 분의, 고맙다고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 말씀을 듣고 다 보내드리고 왔을 때 언니는 공항 구석에 쪼그려 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캐나다 여행을 도맡아 준비한 남자 친구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보고 싶은 남자 친구를 보지도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속상한 마음에. 저렇게 슬픈데 아까는 어쩜 그렇게 해맑게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포기했을까, 포기'해드렸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마저도 뭉클했다. 저런 게 살아있는 배려겠지라는 생각만 속으로 할 뿐이었다. 


아, 나 같은 경우에는 정말 안타깝게도 그중에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는 이틀 뒤에나 있었고 그것도 확정받을 수 없었다. 우선은 항공사가 이런 상황에 제공해주는 공항 근처의 호텔로 가서 머물러야 했고 가장 빠른 시일 내로 가고 싶다면, 나처럼 이렇게 비행기를 놓치는 사람들의 자리를 얻기 위해 웨잇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게 방법이었다. 그 웨잇 리스트에는 이름을 어떻게 올리냐하면 바로 매일 아침마다 선착순으로. 선착순으로 와서 리스트에 이름을 적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는 드라마에서처럼 이게 꿈이길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델 언니와 몸조리 잘하라는 인사를 나누고서 나는 항공사에서 제공해주는 호텔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때 시간은 새벽 1시. 참으로 길고도 긴- 중국에서의, 중국공항에서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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