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x Nov 09. 2016

포퓰리즘을 넘어서

'최순실' 이전과 이후를 고민하는 것

바꿔 말하면, 포퓰리스트가 보기에, 문제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타락시키는 침입자이다(예컨대, 자본가 자체가 아니라 금융 투기자). 즉 구조 자체에 기입된 치명적 결함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어떤 요소이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보기에 (프로이트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병리적인 것(어떤 요소의 일탈적 비행)은 정상적인 것의 증상, 곧 "병리적인"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구조 그 자체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해주는 지시자이다. 마르크스에게서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 히스테리의 폭발 같은 병리적 현상은 "정상적인" 주체 구성(과 그 작동을 지탱하는 숨겨진 적대)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 이것은 또한 파시즘이 확실히 포퓰리즘인 이유이다. 파시즘에서 유대인의 형상은 개개인이 경험하는 일련의 (이질적이고 심지어는 모순적인) 위협들을 묶어 주는 등가점이다, 유대인은 동시에 너무 지적이고, 더럽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일만 많이 하며, 돈을 착취한다는 식이다. (중략)
포퓰리즘에서 이러한 "추상적" 성격은 더 나아가 적으로 선택된 형상의 유사-구체성으로, 즉 인민에 대한 모든 위협의 배후에 있는 단일한 행위자의 유사-구체성으로 언제나 보충된다. 오늘날 우리는 구형 타자기에서 글쇠가 종이를 치는 소리뿐만 아니라 손가락에 느껴지는 반동까지도 인공적으로 모방한 자판이 달린 휴대용 컴퓨터를 살 수 있다. 유사-구체성에 대한 요구의 아주 좋은 사례가 아닐까? 오늘날,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 또한 점점 더 불투명해지고 있기에(누가 컴퓨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미지로 그려볼 수 있을까?)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복잡한 환경을 의미 있는 생활세계처럼 경험할 수 있도록 인공적인 구체성을 재창조하려는 아주 강한 욕구가 있다. (중략) 그리고 "유대인"이란 포퓰리즘의 형상은 그런 유사-구체성의 사례가 아닐까? 거기서 "유대인"은 우리를 규정하는 다수의 익명적 힘을 응축하는 바, 구형 타자기 자판을 모방한 컴퓨터 자판과 닮지 않았나? 적으로서 유대인은 분명 좌절된 사회적 요구의 바깥에서 출현한다.

- 슬라보예 지젝,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맞서」 (이현우 옮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다소 현실과 괴리된 정치적 요청을 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예컨대 최근 논란이 되었던 트럼프(D. Trump) 미국 대선 후보 지지에 대한 인터뷰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철학은 우리에게 유용한 참고점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 시국에서 이 글은 그런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최순실'이 유사-구체성에 대한 요구가 아닌지 한번 물어보아야 한다.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일련의 비리, 즉 현재 시스템의 병리적·예외적인 측면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시스템 자체의 문제는 망각하고 침입자를 찾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승인되지 않은 권력'과 '중심-주변 분리의 심화'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시스템의 '정상적인' 기능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를 비롯한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불평등은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끊임없이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부유층과 자신의 삶을 꾸리기조차 버거운 서민층이 같은 정치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아이러니에 불과하다. 당연히 부유한 이는 물질적인 자원을 활용하여 (연구소를 설치한다거나 정치인을 후원하는 등) 정치적 실천에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획득할 수 있으며 더 큰 규모의 정치적 행위들을 실행할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한편 서민층은 물질적 빈곤으로 인해 정보로부터도, 정치적 실천으로부터도 배제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불평등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후퇴하게 되어있다.


과연 현재의 문제점들이 시스템에 구조적으로 내재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간단하다. 현재 밝혀진 최순실 게이트의 복잡다단한 연결망을 살펴보자. 그 안에는 정치권(ex.정부, 새누리당)-재벌(ex.삼성)-사학재단(ex.이화여대)·연예기획사 등으로 뻗어나가는 권력의 카르텔이 발견된다. 이 카르텔에서 최순실과 정유라를 들어내더라도 이들 카르텔을 잇는 핵심적인 고리들이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그 빈자리는 다른 누구로든 대체될 수 있으며 크게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예컨대 설령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특례입학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화여대의 영리화·구조조정 사업(ex. 미래라이프대학 설치)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학재단과 정치권의 연결고리는 오래 전부터 사학법 개정 반대 등의 이슈를 통해서 강력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으며, 정치권은 재벌의 수요에 맞춰서 기초학문을 배제하고 응용학문에만 투자를 하는 행보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비단 정유라가 특혜를 누리지 않았어도 대학의 구조는 점점 더 불평등하게 재편될 것임은 자명하다. 이는 실제로 우리나라의 다른 역사적 사례들(정경유착과 대통령 친인척 비리)을 통해서도 증명된 바였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불평등과 시스템에 내재된 반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다단한 현실을 적절하게 추상하고 개념화하는 고도의 통찰을 통해 나름의 이론 내지 모델을 만들 것을 요구하며, 또한 실증자료들을 통해서 그 이론이 현실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입증하도록 요구한다. 이런 작업들이 빨리 이뤄지기란 더욱 어려우며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긴급한 시국에는 유사-구체성이 등장한다.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돌릴, 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제거해야 할 구체적 침입자를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되기는 커녕 거꾸로 문제를 근본적인 층위에 가닿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시스템을 지속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조선일보가 감탄스러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조선일보는 최근 11월 8일자 12면의 '핫 코너'에서 "촛불집회서 외면당한 좌파들"을 운운하며 이 문제를 근본적인 시스템과 연관지으려는 시도들로부터 집회를 차단하고자 시도한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선량하고 순수한 다수의 시민들은 이 문제를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으로만 사유해야함을 사람들에게 다시금 주지시킨다. 이는 대중정치의 공간이야말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치주체로서 인식하고 학습하는 거대한 장(場)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던질 수 있는 수이다. 


이에 맞서는 우리 모두의 중요한 과제는 존재하는 적대를 '유사-구체성'으로 치환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일상화된 불평등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포퓰리즘이 아닌 형태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는 집회에 나가 명료하게 알기 쉽게 정리된 구호들을 외치기 전 우리들 스스로가 조금 더 논의하고 토론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집회현장에서 외치는 구호들은 이해하기 쉽고 따라하기 쉽도록 간결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도출되기까지의 많은 논의들을 모두 생략해버린다. 예컨대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구호는 간단해보이지만 그 안에 (시민들의 정치적 압력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자진) 하야, (국회의 적법한 절차에 따른) 탄핵 등의 다양한 정치적 경우의 수를 내포하고 있으며 퇴진이 가져올 권력의 공백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를 두고 많은 논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민중총궐기에 어떤 의제들이 있는가를 검토하고 자신은 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왜 그런 구호들이 제출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사유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부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벗어난 다른 시민들의 구호들에 실망하고 자신의 의견이 '대리'되지 않는 집회에 염증을 느끼고 뒤돌아섬으로써 문제 해결로부터 한발짝 후퇴하게 되고 말 것이다.  


나아가 민주주의를 대리인의 문제로 이해하는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즉, '더 나은 대리인(더 나은 대통령)'이 도래할 순간까지만 이 예외적인 상황을 감내하면 된다는 생각을 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적인 감각의 단절(불투명성 내지 정보 불균형의 문제)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치주체(정치적 인간, 시민)로 이해하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 적실한 제도를 창출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 제도가 전혀 없었던 새로운 제도일 필요는 없다. 기존의 제도를 더욱 세련화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진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의 대리인들이 운영하고 일을 집행하고 있다는 국회 혹은 정부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이며 어떤 일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지 대한민국 국민들이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제도들을 강화할 수 있다. 중등교육과정에서의 '민주주의와 제도'에 대한 부분을 강화할 수 도 있을 것이며, 국회 의정 활동에 대한 정보전달 시스템을 강화(국회입법조사처 조사자료 등 양질의 전문자료들을 쉽게 가공하여 보급)할 수도 있다. 새로운 지역단위 의사결정과정 모델을 만들 수도 있으며, 한국의 미약한 학계 네트워크를 강화하여 대중들이 한국적 현실에 사용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을 확대할 수도 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다양한 제도적 대안들이 제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진보정당이 약세를 띠고 있는 한국에서 쉽게 달성될 수 있는 과제들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이러한 의제를 제출할 적실한 때를 만나기란 더더욱 요원할 것이다.


길게 논했지만 결국 이 글의 논지는 짧고 분명하다. 민주주의란 결국 부던히 시민들의 역량을 개인에게 부과된 권리(정치적 자유)의 형태로 평등하게 확대시키며 그를 방해하는 각종 불평등과 억압에 맞서는 정치적 이념이자 과정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보여준 대한민국의 현 상황은 분명 반민주적이다. 그러나 쉽게 와닿는 '예외적인 것'에만 집착하다간 정작 우리를 여기까지 내몬 '일상화된 반민주주의의 문제들'에 둔감해질 수 있다. 이를 어렵게 이르자면 포퓰리즘과 유사-구체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넘어설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정치적 실천을 조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01년 독일 에센에서 개최된 국제컨퍼런스의 발표문을 묶어낸 책인 『레닌 재장전』(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 2007)에 수록된 글로 급진민주주의 이론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의 논쟁이기도 하다. 지젝은 이 글에서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은 포퓰리즘이 갖고 있는 파시즘으로의 가능성 내지 편향을 간과한다고 논한다.

 창비 173호에 게재된 김종엽 교수의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교육개혁의 길」에 등장하는 표현을 따르자면 "상층 파워엘리트 집단의 네트워크"(p.102)라고 할 수 있겠다.

 집회 참여의 경험은 본인이 어떤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직접' 실천에 나서는 경험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여기에는 왜 내가 집회에 나갔는가, 집회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집회는 효과적인 수단인가 등을 비롯한 온갖 고민거리가 필연적으로 따라붙기 마련이며 이에 대해 나름의 방법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뛰어난 통찰과 자기만의 고민을 지닌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J. Ranciere)가 『미학 안의 불편함』 등의 저작을 통해 논한 바 있는 감각의 분할과 치안의 문제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독한 대중과 인터넷 정치의 (불)가능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