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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Feb 18. 2024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고

예수님은 쇠하고 나는 흥하고

침례(세례) 요한.

예수님에게 침례를 주었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된 마지막 선지자.


침례 요한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시험에 들린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사건과 동급일 것 같습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침례 요한의 상황과 간증을 자세히 적었습니다.

좀 길지만 침례 요한의 의심이 돌발하기 직전에 상황이기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요3:22-30, 새번역]
22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침례를 주셨다.23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침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침례를 받았다.24 그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25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26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침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27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이 정도면 인간계에서 최고의 간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했고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재평가를 받아서 쇠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 11:11, 새 번역]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그렇다면 침례 요한의 의심은 어떻게 어디서 생긴 것일까요?

읽었던 본문을 보면 [그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라는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저의 상상이지만 [옥에 갇힌 요한]은 상당한 심경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행동을 했다는 방증입니다.


“어 이것이 아닌데?” 이런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수시로 침례 요한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는 예수님을 의심했을까요?

분명 자기 입으로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라고 말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자신이 말한 것을 번복했을까요?

침례 요한의 심경 변화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감옥에 갇힘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사역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침례 요한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제가 침례 요한이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정이입을 해봅니다.


저라면 … 이 부분이 좀 섭섭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제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좀 이해가 되는데 제자들은 어부를 중심으로 세리도 있었습니다.

[저라면] 왜 나(침례 요한)를 제자로 부르지 않았을까라는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예수님에게 침례를 주었던 사람인데 말이야)


말로는 자신이 쇠하여야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버림(왕따) 받았다고 생각하니

[저라면] 무지 섭섭하고 짜증 나고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침례 요한의 의심 동기에 대해서 정확히 수 없지만,

제가 그 상황이라면 불경스럽지만, 침례 요한이 다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침례요한이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교당할 때까지 사도 직분에 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사도)라고 부르는 사도계보에 낄 수가 없었죠.


베드로는 12번의 사도 맛디아를 뽑을 때 이렇게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그었습니다.

[행 1:22, 새 번역] 곧 요한이 침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선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꿋꿋하게 자신을 사도라는 근자감(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신감)으로 주님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침례요한보더 더 많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마지막 순교도 침례요한처럼 감옥에 갇혀서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침례 요한도 미션을 받았고, 사도 바울도 미션을 받았습니다.

둘 다 열심히 사역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가장 큰 차이점은 지향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꿈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여 예수님 죽음에 동참하길 바랐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감옥은 오히려 소망의 이루어짐이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침례 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의 흥하심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침례를 많이 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을까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은 흥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아 쇠하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침례요한의 눈에는 예수님이 흥하게 보였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하나님의 제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흥하였습니다.

제가 말하는 흥하였다는 것은 번영신앙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영적 변화, 거듭남을 말합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으로 흥하여진 자신을 이렇게 쇠하게 했습니다.


[고전 9:26-27, 새 번역]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쇠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흥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 눈에는 예수님이 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침례를 주었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도, 그중에 한 명은 배신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버려져서 쇠하게 되는 것을 침례 요한은 알지 못했습니다.


침례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는 버림당하고 나는 쇠하리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갈2:20, 새번역]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고 나는 죽습니다

예수님은 살고 나는 죽어야 합니다.


참고로

저는 원천침례교회 / 민트교회(담임목사 이계원)의 교인입니다.

https://www.wonch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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