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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leuze Jun 30. 2015

불면증

 


   And he said to me, "It is done!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the beginning and the end. To the thirsty I will give from the fountain of the water of life without payment. He who conquers shall have this heritage, and I will be his God and he shall be my son. But as for the cowardly, the faithless, the polluted, as for murderers, fornicators, sorcerers, idolaters, and all liars, their lot shall be in the lake that burns with fire and sulphur, which is the second death."

 

- Revelations 21 : 6 ~ 8 -  


 

까만밤이 사라질 무렵 그것이 아쉬운 듯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을 적과 어둠을 응시하는 것은 다른 상황을 맞은 은 듯 했지만 요동침보다는 고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도 있었다.

   

눈을 감은 고요함 속에서 어떤 대상을 떠올리고 상상하면 장면들이 눈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마치 불이 꺼진 영화관에서 스크린에 빛이 열리고 영화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은 나의 자유로움으로 시작하여 제멋대로 끝난다는 점이다. 스토리도 내 마음대로 손질이 가능하다. 때로 부도덕한 상상을 하는 것은 묘한 쾌감을 주기도 했다. 물론, 상상이라는 영화관을 열어두는 일은 매일 변하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라 피곤에 젖은 날은 문을 닫고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그날은 의식 속에 존재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영화관에 몰래 들어와 '꿈'이라 불리는 내 의지와 무관하며 의식과는 연결된 영화를 틀어 놓기도 했다.

   

지금은 달랐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도록 극장 안의 커튼과 문을 모두 닫아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점이 약간 흐린 상태로 빛줄기 하나가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작은 체구의 뒷모습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잘 빗어넘긴 기름진 머리카락과 분위기를 통해 남자일거란 추측에 무게를 실었다. 도로 양 옆으론 들쭉날쭉하게 잡초들이 가득 뻗어있었는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살아있는 동물이 꿈틀거리는 듯 했다. 살아있는 땅 위로 촉수가 뻗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비가 왔었는지 축축하게 젖은 흙과 풀들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뿌연 증기를 뿜어댔다.

   

상상은 더욱 깊어져 잡초들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만큼 빠르게 자라났고 어느 새 남자의 키보다 더욱 높게 솟아 있었다. 성장은 힘을 부여했고 그것은 지배의 기회였다. 식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더 이상 잡초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자라난 식물 하나가 빠른 속도로 도로 가운데의 남자를 향해 몸을 숙이더니 남자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당황한 남자는 저항하려는 듯 몸을 비틀었으나 그것이 반항이 되지는 못했다. 오른팔은 힘없이 식물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남자의 두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이끌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남자는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왼편에서 자라나던 식물 하나가 추락하듯 땅으로 고개를 숙여 그의 왼팔을 붙잡았다. 동시에, 힘없이 끌려가던 남자는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를 두고 두 식물은 대결하듯 좌우로 팽팽하게 힘을 주기 시작했다. 둘은 팽팽했고 어느 한쪽으로의 치우침없이 그저 남자의 두 팔이 최대한 넓게 벌어졌다. 두 팔이 벌어짐과 동시에 바닥에 닿아 있던 두 다리는 공중으로 솟아 올랐고  태양을 등지고 만들어진 그림자는 마치 높이 솟은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고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선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은 고통을 줄 것이냐의 선택에 따라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눈앞에서 괴로워하는 남자가 선택의 여지없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더 특별한 희생이 강요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고통을 주는 쪽이었다. 식물이 살아있는 동물처럼 꿈틀댄다는 상상쯤은 이미 영화 속에서도 질리도록 썼던 소재지만 눈에 담긴 장면만큼은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에 의해 잘려 나가며 사라지지만 이것들은 그런 역할이 아니었다. 이들이 이제 할 일은 서서히 양쪽에서 남자를 더욱 조이고 당기는 일이었다.

   

남자는 머리를 심하게 흔들며 고통스러워했다. 고개를 거의 뒤로 젖히기도 했으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입을 벌리며 무어나 외치는 듯 보였지만 그것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소리가 들렸어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충분한 몸의 뒤틀림이 고통을 짐작하게 했고 나의 상상만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찢겨 죽을 수도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살점들이 떨어지고 길엔 핏물이 천천히 스며들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뻔했고 의미없는 하나의 살생이었다. 뻔한 얘기때문에 뻔뻔하게 의도된 명분을 만들어 풀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법은 하나.

   

뒷모습으로만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반시계 방향으로 서서히 돌렸다.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괴로워하는 남자는 땀에 젖어 말끔히 넘겼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풀어 내려와 있었고 얼굴엔 어둠이 내려 앉아 잘 보이지 않았다. 온몸을 고통에 담근 그는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양을 돌아선 그의 모습은 몹시도 지쳐 보였고 이미 생을 포기한 듯 보였다. 그가 다시 한번 얼굴을 들어 올리길 기다리며 나의 시선은 그곳에 멈췄다. 하지만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태양은 점점 하늘에 가까워지며 지상을 뜨겁게 달궜다. 남자에게 내려 앉은 열은 그의 등을 더욱 젖어들게 만들었으나 식물의 몸을 감싼 태양빛은 축축하게 젖었던 그것들의 줄기를 순식간에 말려버리고 있었다. 뜨거움에 몸부림치는 식물은 하늘 위에서 점점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남자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던 모습처럼 식물들도 몸을 움츠리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남자를 강하게 압박하던 힘이 남아날 리 없었다. 식물들은 거의 동시에 남자를 내려 놓았고 새 한 마리가 추락하듯 곧게 뻗은 길 위로 풀썩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괴물처럼 달려들던 식물들 역시 보통의 나무나 풀로 돌아가고 있었고 하늘보다는 땅에 가까워져갔다. 그것들은 이내 도로 밖으로 다시 돌아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태양은 그 사이 더욱 높이 솟았고 지상을 빛으로 가득히 덮었다. 가득한 빛은 남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비춰줬다. 흥건한 땀은 끈적이는 피와 섞여 남자의 몸을 반짝거리게 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는데 그것은 고통이 이제는 끝났기 때문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얼굴 근육을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 하더니 다시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몸은 말라갔다. 피는 자국만 남기고 다시 몸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듯 보였고 물은 식물을 위한 공기가 되어 사라졌다.

   

태양은 지상을 바싹 태울 듯 열을 뿜어냈고 길 위의 육체 한 구는 마른 가지처럼 뼈만 남을 정도로 습기를 빼앗겨 갈라지고 뒤틀렸다. 그 위로 입김을 불 듯 뜨거운 바람이 지나갔는데 재가 된 남자를 공중 위로 날려 보냈다. 그것은 일종의 풍장(風葬)이었다. 작은 바람이었지만 장사를 치르기에 충분했다. 가루는 바람에 따라 길가로 흩어지기도 했는데 씨앗이 뿌려지듯 흙 위에 내려 앉았다. 자연은 그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적어도 눈 앞에서는. 길 위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람으로 인해 열기는 잦아들었고 어느새 길가엔 봄기운이 느껴지는 풀들로 생명의 기운이 넘쳐났다. 굉장해 보였던 식물 두 그루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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