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작가>

당신이 낯선 여행지에 불시착했다면....

by 숨결
IE002833636_STD.jpg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책 표지 ⓒ 위즈덤하우스


정세랑 작가는 여행을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뉴욕까지 날아가고, 이벤트에 당첨되어 런던에도 가고, 남자친구의 유학을 따라 독일에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여행기가 어쩌다가 9년 동안 계속되었고, 누구나 여행을 그리워하게 된 이때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덕분에 시간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쌓여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 묘한 여행기가 탄생했다. -출판사 책 소개 중에서-


정세랑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우리 가족이 겪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여행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선물하지만 어떤 때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는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선의와 배려가 전부일 때가 있다.


우리 가족(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나)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영국으로 갔을 때 일이다. 자유여행을 계획한 우리는 며칠 동안 런던을 구경하고 새로운 여행지로 가기 위해 숙소를 출발했다. 다음 여정인 에든버러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킹스크로스역으로 향했다.(한국의 서울역과 비슷하다). 터질듯한 캐리어를 네 개를 질질 끌면서 계단을 내려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지하철이 안 왔다. 킹스크로스역에 시간 내에 도착해야 예약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아이들은 지하철이 왜 안 오냐고 보채고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 탔다.(제발 빨리 와라)


런던에 처음 도착해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갈 때 택시를 탔다가 바가지요금을 썼던 속 쓰린 기억이 있어서 런던에서 택시는 절대 안 타기로 결심했다.(택시 기사님 부디 배 터지게 떼돈 버시기를) 한 시간이나 일찍 숙소에서 나왔는데 지하철이 연착해서 결국 에든버러행 기차를 놓쳤다. 보통 정시 출발을 하지 않는다는 런던 기차는 그날따라 1분의 오차도 없이 출발해 버렸다.(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다) 특실로 가족 단체석을 미리 한국에서 어렵게 예약했는데 눈앞에서 백만 원이 날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킹스크로스역에서 졸지에 갈 곳 없는 난민이 되었다. 아내는 울상이 되었고 나도 정신줄이 나갔다.(망할 놈의 런던 지하철) 아이들은 우리 이제 기차 못 타는 거냐고 칭얼거렸다.(아! 미치겠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하소연을 해 보려고 역무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막상 역무원을 만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급하게 영어 단어를 조합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평소에 영어공부 좀 열심히 할걸!) 결국 아내가 울먹이며 잠긴 목소리로 역무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브웨이 이즈 레이트~(번역: 지하철이 늦게 왔어요.)


역무원은 한참 우리 가족을 쳐다보다가 지하철 표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한참 지하철 표를 돋보기로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개찰 시간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더니 한참 뭐라고 설명하더니 30분 후에 출발하는 에든버러행 열차표를 무료로 내주었다(그런데 불행히도 입석이었다.) 꼬박 4시간을 서서 가야 하는 티켓이었다. 그래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나는 넙죽 받으며 땡큐, 땡큐를 연발했다.(내가 제일 잘 쓰는 영어 단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런던 지하철은 부분 파업으로 열차가 하루종일 지연 운행되었다고 했다.(하필 그날 파업하나) 역무원이 파업 상황을 고려한 것인지, 우리 가족의 처지와 아내의 눈물 어린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손에 기차표를 쥐고 우리 가족은 캐리어를 질질 끌고 승강장에 갔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런던 킹스크로스역에서 우리는 졸지에 갈 곳 없는 여행객이 되었다. 나는 뭐 하러 이 고생을 하러 돈 주고 런던까지 왔는지 후회했다.(정말 아내와 아이들의 원망의 눈초리 때문이 아니었다) 열차가 도착하고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기차에 올랐지만 우리는 쭈뼛쭈뼛 통로에 서서 눈치 보는 신세가 되었다. 열차 안을 순회하던 역무원이 다가오더니 우리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다. 우리가 에든버러에 간다고 말하자 비어 있던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다음 역에서 타는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 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우리는 열차에서 승무원 엔젤(천사)을 만났다.)


그런데 다른 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기내식이 우리 가족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아! 너무 먹고 싶어 군침이 돌았다.) 나는 억울함을 참으며 열차 안 매점에서 질기고 퍽퍽한 샌드위치 네 개를 사 왔다. 아침 대신 샌드위치를 곱씹으며 오늘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는데 창밖의 넓은 초원에서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씹으며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찔끔 났다.


아이들은 지쳐서 깜빡 잠이 들고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자리 주인이 올까 봐 나는 안절부절했다. 얼마 후 역무원이 오더니 우리가 앉은 자리에 승객이 없을 거라는 희소식을 전해 주었고 여유분의 열차 기내식도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오! 이 분은 진정 엔젤(천사) 중에 엔젤(천사)이었다)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깨워서 따뜻한 스프를 먹는데 안도의 눈물이 핑 돌았다.(겨우 스프가 뭐라고) 아내도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스프를 먹으며 처음으로 마주보며 웃었다.


사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최악을 각오하고 여행하는지도 모른다. 예민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조금 더 신경이 굵은 사람들은 무의식 깊이 묻어놓았겠지만. 아름다운 해변에도 맹독성 해파리들이 있고, 환한 잔디밭에서도 흉기가 칼집에서 빠져나온다. 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같은 장소에서 언제나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지금이 그리 좋지 않은 시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 - 본문 중에서-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운이 크게 작용한다. 사실 여행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작은 관심과 도움이 여행자를 난처한 상황에서 구해준다. 길을 잃었을 때마다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던 행인, 지하철 계단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같이 옮겨주던 아저씨, 낯선 여행지에서 가벼운 인사와 미소로 보내주던 아주머니, 스위스에서 숙소를 찾지 못해 밤길을 헤매고 있을 때 차를 태워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던 청년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따뜻하다. 우리는 모두 지구를 여행하는 공간 여행자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간 여행자이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자. 그 손길이 모이면 지구 여행자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밝혀주는 가로등이 하나씩 늘어날 것이다.








이전 07화<지지 않는다는 말. 김현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