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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한 달짜리 재난 문학

ㅈ같은 인간들이 원래 예술과 깨달음을 남기고 가는 법이잖아요;

by 염전씨

정말 객관적 개쓰레기이자 무책임하고 위선적이고 감정적으로 착취하는 사람을 만나 한 달 내내 감정 롤러코스터를 탔다. 만나는 내내 나도 사실 내가 남자친구를 원하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끝난 뒤 돌아보니 사실 그에게 바랬던 건, 그냥 그가 좋은 사람이기를, 그거 하나였던 것 같다. 이 긴 터널에서 나와 만난 네가 좋은 사람이길, 너무 약해진 나의 옆에 오래도록 앉아서 내 상처를 같이 들여다봐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내 쪼그라든 못난 마음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네가 너의 삶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너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그래서 제발 내가 이 세상과 사람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시 살고 싶어 지기를, 다시 사랑하고 싶어 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가 쓰레기라는 사실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이렇게까지 외로워지는 건, 이 세상에 나를 지켜줄 사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져서이다.


그도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안다. 나의 글을 읽는 것, 중간중간 불안 했던 모습들, 함께 보냈던 시간의 깊이, 그리고 은연중에 하던 모든 말들, 그것이 그 순간만큼은 그가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한국에 가고 싶었을 거고, 그래서 조금 더 리모트 근무가 가능한 새로운 팀에 가고 싶었을 것이고,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꾸 느껴져서 불안했을 거고, 그래서 계속 빠르다고 말했을 거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문자 하나만 덜렁 남겨두고 그냥 도망가지는 못했던 거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나에게 진실을 말해야 했던 거겠지. 근데 이걸 다 저버리게 한 것은, 그의 오만과 궁극의 자기혐오이다. 오랜 결핍과 순간의 쾌락을 딛고서, 가슴 깊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우선시하여 지키는 것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기애이니까. 본인이 사랑할 수 있는 인생을 본인에게 어렵게 구해다 줄 수 있는 것이 진짜 자기애니까.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그냥 그가 약한 사람이어서 일어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은 역겹고 위선적이었지만, 어쩐지 분노가 차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언젠가는 그에게 다시 사랑이 주어질 텐데 그때는 그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길, 마음의 평화를 찾길 바란다. 졸업도 취직도, 어머니 상황도, 그를 그렇게까지 아프게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본인의 어떤 모습을 그렇게까지 용서할 수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스스로를 용서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다른 한 편, 이 한 달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1. 내 사랑을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생각하고 대했다는 게 너무나 큰 상처가 됐다. 나는 왜 늘 진심이어서 이렇게 상처받나 싶어 속상하지만... 그것이 내 정체성이다. 나는 아무리 쿨하려고 노력해도 어디 하나 모자란 사람처럼 늘 진심일 수밖에 없는, 사람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는, 남의 상처를 보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사람, 이해가 안 되더라도 또다시 이해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끝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으로 계속 살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만 동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이번 일로 오래 아프기를 바라면서도 결국은 회복하기를 바라는, 모진 소리를 하며 화를 내지는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그런 내가 너무 싫고 찌질하다. 나도 꼭 시원하게 나쁜 새끼라고 소리 지르고 내가 감지하는 위협,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해 확실히 잘 얘기하는 사람이고 싶다. 근데 나는 아마 평생 그런 사람은 못될 것이다. 나는 내성발톱 같은 우울을 안고서 종이와 펜을 쥐고 내내 끙끙거리겠지. 그리고는 지금처럼 너를 미워하지도 못한 채 니 음악을 들으면서 그저 행복을 빌겠지.


2. 이상한 낌새가 많았음에도 그에게 돌아가게 됐던 나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그에게 뭘 투영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해 봤다. 내가 그에 대해 좋아했던 점들은, "자기 연민이 없는 것 같다, 따뜻한 마음, 세상에 대한 호기심"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좋아하는 점’들이 진짜였을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려고 했던 점’일까? 그가 자기 연민이 없었던 이유는 연민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의 따뜻함은 완전히 비어버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외투였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어 외부 세계의 문제로 도피하고자 함이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던 마음이, 그 장점들을 꾸며냈던 것 같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조건에 이런 세 가지가 있었구나, 하는 것이 새삼 크게 느껴지는 사건이었다.


3. Q와 마지막 통화를 하는 당시에는 그가 불행한 게 나를 치유해 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결국 후회할 걸 아니까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더 잔인하게 말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나도 모르게 그의 안녕과 평화를 바래주면서 나도 내가 답답했다. 근데 돌이켜보면 이건 내가 성숙했다는 증거였다. 불과 2주 전, 2/16에만 해도 성숙을 모르겠다고 글을 썼는데 말이지… 내가 마치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Q의 행복을 바래줬던 건, 내가 과거의 이별을 충분히 돌이켜 봤기 때문이다. C와의 이별에서 가장 후회됐던 것은 딱 하나다. 내 진심을 전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다. 너무 상처받은 나머지 모진 말만 잔뜩 했다. 내가 그에게 사랑받는 것만큼이나 바랬던 것은 그가 행복해지는 것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걸 내가 줄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러웠던 것뿐이라고, 네가 부디 내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지 못한 것이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제는 그 배움이 나도 모르게 내면화되어서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구나 싶었다. Q가 어떤 행동을 했든 간에, 난 그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진심이었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의 고통이 나의 승리일 수는 전혀 없고, 나는 그보다 내 인생을 훨씬 더 사랑한다. 내가 내 삶을 애착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돼서 자랑스럽다.


4. 다른 것보다 Honesty와 Integrity는 가정교육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았다"류의 말을 들을 때 늘 궁금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근데 이제 알게 됐다. 정직과 책임감, 잘못을 수용하는 능력이 가정교육의 산물이다. 내 부모님은 내가 몰래 숨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 빨간펜 학습지를 몰래 내다 버린 때, 동생이랑 싸울 때 화를 냈다. 그렇지만 내가 거짓말했을 때는 슬퍼했다. 거짓말을 했다가 들켰을 때,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내 어깨를 꼭 붙잡고 아주 슬픈 눈으로 "절대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아도 됐던 내 인생은...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가? 내 잘못과 내 못난 모습을 마주해야 하는 건 너무나 괴롭지만, 그 마주할 힘 자체를 준 세상에서 자란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실망을 계속해서 수집해야 한다. 미친 사람처럼.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없으니까, 실망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얻을 수가 없으니까. 처음 24시간 동안은, 내가 고작 한 달 만난 사람 때문에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것이 분하고 화가 났다. 그렇지만... 24시간이 지나니까 한편으로는 이게 내가 삶의 플랫폼을 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마친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는데도 필히 해야 하는 미팅을 모두 다 잘 해냈고 특히 고객과의 미팅은 즐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미뤄온 브리타 환불도 했고 F45도 다녀왔다. 다음 고강도 운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15초 동안에도 “네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잘 견디고 이겨냈다. 예전부터 사고 싶었던, 소재가 엄청 좋고 말도 안 되게 비싼 추리닝을 샀다. 내가 열심히 일궈온 내 일과 운동하는 습관과 요리 실력과 작은 사치를 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이렇게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을 때마다 내가 가진 기반이 보여서, 나라는 인격이 어떤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지 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 그래서 가장 외로운 이때, 그 어느 때보다 나라는 인간이 자랑스러워. 내가 그에게 소개해준 백예린 노래들, KARDI와 이츠의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걸을 수 있는, 온전히 내가 지어온 인생이 자랑스러워. 너도, 나도, 우리 다...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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