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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an 09. 2022

분주히 행동하는 신념

<핵소 고지>, 멜 깁슨, 2017

* 본 후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전쟁은 신념들이 생과 사를 걸고 부딪치는 각축장이다. 전쟁터에서 산화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육신만이 아니다. 그를 ‘그’로서 존재하게 했던 취향, 관계, 사랑, 꿈들도 모조리 산화한다. 육체를 제외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타협하지 않는 것’들로 만들어진다. 타협하지 않는다는 건 그가 오랫동안 강하게 믿어왔다는 뜻이며 원했든 원치 않았든 죽을 때까지 그 뜻을 품었다면 그의 삶을 건 믿음이었기에 그 사람의 굳은 믿음, 신념이 된다. 


전쟁터에서 어떤 신념은 15분 만에 정의되고 증명될 새 없이 산화한다. 그렇게 수많은 신념들이 초를 다투며 사라져가는 곳에서 영화 <핵소 고지>의 주인공 ‘데스몬드’ (앤드류 가필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종교적 믿음을 흔들리지 않고 지켜내 영웅이 된다. 하지만 믿음이 굳어져 신념이 되기까지 그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라는 시련을 겪는다. 


데스몬드의 아버지, ‘톰’(휴고 위빙)은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남긴 것은 묘비만 남기고 사라진 친구들과 술, 그리고 폭력이다. 데스몬드의 어머니 ‘버사’(레이첼 그리피스)는 ‘전쟁이 그를 바꿔놓았다’며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살았다. 데스몬드는 평생 폭력의 그림자 속에 살아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편의 폭력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 신념이 자랄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이 울타리가 무너질 뻔한 순간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총을 들게 된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그는 그 총을 빼앗아 아버지에게 도로 겨눈다. 이는 다소 물렁했던 그의 신념이 단단해질 수 있는 상처가 되었다. 스스로 본인의 믿음을 저버린 행동인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살의를 되갚아 줄만큼 강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쏜 단 한 발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었지만, 그가 총을 쏘지 않음으로써 데스몬드의 믿음은 더욱 단단해진다. 동시에 그가 2차 세계대전에 자진 입대를 하게 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리라는 것의 신호이기도 하다. 


톰은 자신의 아들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비록 지금 비굴하고 눈치 보이더라도 전쟁터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전쟁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듯이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갈 테니. 하지만 톰은 데스몬드가 집총을 거부해 참전은 물론이거니와 감옥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군복을 입고 그의 옛 상사를 만나러 간다. 이제는 사령관이 된 그의 상사에게서 받은 편지 한 장으로 톰은 아들을 믿음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아들을 생사의 위기로 보낸다. 그곳에는 아들의 삶을 건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의 지난한 폭력은 데스몬드가 성장해가고 아버지가 약해지면서, 폭력의 가해자가 뒤바뀌는 경험을 통해 전환되었다면, 훈련소에서 마주한 폭력에 그는 폭력에 대항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에 저항한다. 같은 종교를 믿지만 총을 들기로 한 군인들의 눈에 그는 ‘정신 이상자’, ‘우아한 척 하는 귀족’, ‘겁쟁이’로 보일 뿐이다. 군의 통솔자들은 그를 빠르게 사회로 빼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뜻이 다른 ‘아군’을 걸러내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다른 폭력들보다 교묘했다. 그들은 ‘연대 책임’과 ‘고립’의 방식으로 데스몬드를 조여 온다. 결국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가해자들은 동기들이었지만, 데스몬드가 끝까지 싸웠던 것은 ‘다른 것은 배제하는’ 군대의 가치였다. 


데스몬드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지만, 그의 신념에는 의심의 안개가 끼어있다. 단순히 동기들 사이에서 서로를 구해줄 총 한 자루가 모자란 것을 넘어서 한 발 디딜 때마다 죽음이 쏟아지는 곳에서 그가 과연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자신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그가 생명을 향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증명된다. 데스몬드는 후퇴하지 않고 전쟁터에 혼자 남아 하룻밤 내내 부상자를 핵소 고지의 절벽 아래로 내려 보낸다. 그는 그 때마다 신에게 ‘한 명만 더 구하게 해주세요.’ 라며 기도한다. 신은, 특히 전쟁터에서의 신은 가혹하리만치 죽음에 무심하다. 신을 증명하는 것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으며 ‘신’에게 감사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건 신이 놓은 무작위적인 죽음을 외면한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이다. 


데스몬드가 신을 부를 때마다 들려온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데스몬드는 그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며 그의 믿음을 실행한다. 신은 단어로, 혹은 사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담은 행동들로 증명되는 것이다. 영화가 끝에 닿아 데스몬드가 영웅이 되어갈 쯤에는 신의 신성에 추상은 없다. 단지 존재가 존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실행하는 사람의 분주한 움직임. 그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행동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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