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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Aug 21. 2022

구름 뒤에 햇살 있어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데이비드 O. 러셀, 2013.

* 본 후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팻’(브래들리 쿠퍼)은 8개월간의 정신병동 생활을 정리하고 막 사회로 복귀했다. 병원과 합의가 된 퇴원은 아니었고, 더 이상 아들이 정신병동에 익숙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엄마 ‘돌로레스’(재키 위버)의 결단이었다. 따라서 조울증, 심한 감정기복과 망상, 환청 등 그가 일상을 살아가며 일으킬 잡음에 대해서 병원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돌로레스는 그 사항에 거침없이 사인을 한 뒤, 아들을 사회로 끌고 나온다. 이것이 ‘Excelsior (더욱 더 높이)’를 삶의 표어로 삼고 매일 운동을 하며, ‘인생의 먹구름을 다 걷어내고 햇살이 비추게 하겠다.’는 말을 주문처럼 달고 8개월을 살아온 팻에게 비친 첫 번째 햇살이다.


아빠는 팻에게 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팻과 팻 주니어는 거울처럼 닮아있다. 8개월 만에 집에 돌아갔을 때 팻의 아빠는 은퇴 후 동네 규모의 사설 스포츠 도박을 운영 중이었고, 징크스에 집착하며, 때때로 본인의 성질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둘은 각자 서로의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아빠는 징크스에 집착했고 팻은 떠나간 아내 ‘니키’(브레아 비)에게 집착했다.


팻과 니키의 사연은 다소 복잡한데, 니키의 외도현장을 목격한 팻이 외도 상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면서 팻은 정신병동으로 옮겨지는 동시에 니키와 주변 인물들에게 접근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관계의 선을 넘은 것은 니키였지만, 물리적 선을 넘은 것은 팻이었다. 팻은 이 물리적인 선을 줄이기 위해 집착한다. 니키의 맘에 다시 들기 위해서 매일 같이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그녀와 접촉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주변에서 니키의 마음은 이미 떠났다고 대놓고 말해도, 그는 니키에게 조금이라도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매일 같이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달리러 나간다.


출처 : 다음 영화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교통사고로 남편 토미를 잃었다. 티파니와 토미의 사연도 간단하지는 않다.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토미와 육체적 관계를 비롯해서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던 티파니. 소원한 관계를 풀어보려 토미가 란제리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티파니는 본인이 육체적 관계를 멀리 하지 않았으면, 그가 란제리를 사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리고 그녀는 비어버린 마음의 자리를 육체적으로 채우려했지만, 주변 관계와 본인의 평판이 망가긴 채로 사회에서 동떨어져 고립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춤을 추면서 본인의 삶을 다시 세워보려고 한다. 그때 그녀의 앞에 팻이 나타났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나와 같이 미친 사람.


두 사람은 배우자를 잃었다는 비슷한 상처를 가진 동시에 공개적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그들은 관계를 둘러싼 가식의 냄새를 맡는 후각이 예민하게 발달 되어 있다. 문제를 에둘러 간다던가, 은유한다던가,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가식들에 그들은 즉각적으로 숨김없이 반응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모난 돌처럼 쳐다보지만, 주변 사람들도 울퉁불퉁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상’ 그리고 ‘더 높은 것’에 사로잡혀 있고, 때문에 숨 막혀 한다. 그들 또한 구분되지 않은 ‘비정상’의 삶을 살고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처음 만난 날 이후로, 티파니는 팻과 함께 달린다. 팻이 니키를 의식하며 그녀를 거부하고 도망가도 티파니는 늘 그를 쫓아 달린다. 그의 등 뒤에 비치는 햇살처럼. 하지만 팻은 티파니를 본인과 다르다며 거부하고 구분 짓는다. 본인은 ‘결혼’한 사람이고, ‘한 사람’만을 바라볼 것이며, ‘그녀와 동급이 아니다.’ 라고. 티파니는 그의 모순에 역함을 느끼고 폭발한다. 그의 결혼은 끝났고, 티파니를 봤을 때부터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팻에게 스스로를 바라보고, 용서할 여지가 있는지 따져 묻기만 했지, 눈앞에 있는 모든 걸 쓸어버리고 그에게서 떠나가진 않았다.


팻이 말했던 ‘동급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녀가 여태 했던 조언들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동시에 그녀를 또 구분 짓는 말이었다. 할로윈 데이에 분장을 하지 않은 단 두 사람. 서로 의지할 수 있을 것이 거의 분명한, ‘비슷한’ 사람에게서 어처구니없는 평가와 위선의 말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관계를 터뜨릴 정도로 분노하며 그를 놓고 자리를 떠난다. 이제부터는 팻이 햇살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출처 : 다음 영화


이 사건 이후로, 팻과 티파니는 춤을 함께 춘다. 티파니는 연말에 있을 댄스 경연에 파트너가 필요했고, 팻은 본인의 편지를 티파니를 통해 니키에게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한 배를 탔다. 팻과 티파니의 댄스 경연에 팻의 아빠의 스포츠 도박이 ‘이중 내기’라는 이름으로 겹쳐지면서 잠시 떨어져 있었던 관계의 화합이라는 과제가 클라이맥스에 얹어진다. 영화는 이 때부터 산개되어 있던 문제들을 단숨에 묶어서 본격적으로 해피엔딩을 향한 길을 따라 걷는다. 이들이 마주하는 해피엔딩은 ‘Excelsior (더욱 더 높이)’의 방식은 아니다. 10점 만점의 5점으로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평균’인 그 점수가 되지 않았더라도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무대를 보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성도’에 상관없이 팻과 티파니가 상처 난 마음을 안고서 준비한 무대, 과정과 그 과정의 ‘완료’를 응원하고자 모였기 때문이다.


출처 : 다음 영화

5점이라는 숫자가 영화가 준비한 극적인 행운이라면, 무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영화가 내내 쌓아둔 구름 뒤의 햇살이다. 영화는 팻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의 뒤에 햇살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내내 ‘구름을 몰아내고 햇살을 찾겠다.’고 말한다. 몸을 만들면, 책을 읽으면,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되면, 니키를 만나기 전에 티파니에게 빠지지 않고 내가 처신을 잘 한다면, 마침내 니키를 만나면, 그는 니키를 중심으로 한 ‘목적’에 함몰되어 주변에 펼쳐져 있는 햇살을 보지 못한다. 티 나지 않게 가정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엄마 돌로레스, 가까운 곳의 행복 혹은 행복할 가능성들을 살피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그의 시선을 바로 잡아주는 티파니가 그의 삶에 있어서 주요한 햇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밖에 본인들의 문제로 허우적대면서 살면서도 그들의 삶에 팻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주변 사람들. 비록 그 과정이 서툴고 미숙해서 상처를 주더라도 그 지속적인 관계가 그가 구름만을 바라보며 찾지 못했던 햇살의 존재다. 영화는 이 작은 관계의 햇살들을 모아 팻과 티파니의 삶에 드리운 구름에 비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더 이상 구름 아래서 헤매지 않고 항상 그곳에 있었던 햇살 아래서 서로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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