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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 Apr 10. 2022

[안드레아스 거스키] 전시회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숙취로 정신 못차린 채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을 찾았다. 예전에 한번 왔을  지하연결통로로 왔던  같은데 나도 모르게 1층으로 나와버렸다.

원형의 멋진 조형물이  하니 자리하고 있고 조경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예전에 사옥이 오픈하자마자 달려와 구경했던 그 로비가 나타났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아름답다.

안드레아스 거스키 전은 한국에서 최초 전시라고 하고,  전시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신작도   있다고 들었다.

그냥 전체적인 소감은 그의 작품은 이렇게  사이즈로 넓은 공간에서 봐야 맞겠구나 싶은. 아모레퍼시픽이 사옥 공간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작품을 선택했고, 전시 공간을  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진의 편집과 후작업이 쉽고 일반적인 요즘이기에 그의 몇몇 예전 사진 작업에 써있는 작품 설명은 새롭 않게 다가왔다. 하지만 작품 발표 당시에는 선구적이고 파격적이었을  있겠다 싶었다. 오히려 빽빽하게 밀집된 이미지를 하나하나 선명하게 채워넣는 방식이 그의 작품 특징 중 하나로 느껴져 흥미로웠는데, 편집과 수정을 통해 완성한 빽빽한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을 찍었지만 변형되어 있고 가까이 가서도 이미지가 선명하고 멀리 나와서 보아도 선명하다. 실재하는 이미지이지만 아니다. 수직과 수평이 정확하게 맞는 편집된 이미지들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어디에 있을 법 하지만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이미지를 보며 나는 매우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느꼈고 한편 두려움도 느꼈다.


거스키의 반복적이고 밀집된 이미지를 선명하고 빼곡하게 화면 가득 채우는 방식을 가만히 바라보다 엉뚱하게도 [월리를 찾아라]  생각났다. 어릴 적 빼곡한 그림 속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월리를 찾느라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던 기억.

월리를 찾아라는 전체 그림이 어떤 이미지를 나타내진 않지만 그래도 어떤 큰 주제가 있다. 자꾸 가까이 들여다보고  속에 다양한 군상들을 읽게 만든다. 거스키의 작품도 그렇다. 전체적으로 봤을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느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게 만든다.  속에는 각각  다른 파일철, , 사무용품이 있기도 하고, 마트의 초콜릿, 과자가 있기도 하고,  다른 인물들이 있기도 하고, 저마다의 창문, 저마다의 방이 있기도 하다.

거의 다 엄청난 사이즈의 대형 사진이었고, 그에 걸맞게 아모레퍼시픽은 공간을 널찍하게 썼다. 그래서인지 멀찍이서 전체 그림을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 세부 그림을 는데 자유로웠고 전체 이미지와 그 속에 조금씩 다 다른 세부 이미지를 읽는 것, 그리고 주제를 유추하다 옆에 작게 쓰인 제목과 설명을 읽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도록의 작품 이미지를 찍어서  사진을 인화한 위의 작품도(작품명이 뭔지 안찍어와서 잊었다.) 처음 사진을 마주했을  ‘이런 사진 누가  찍어?’ 라고 생각했지만, 설명을 읽고 공감했다. 갑자기 얼마전 마티스 전시회를 열심히 보고 나와서 기프트샵에서 한참 들었다 놨다 했던 도록이 떠올랐다. 양장에 두꺼운데다  사이즈인 도록은 그날 내가  전시 작품이  들어있었다. 상세한 설명과 함께. 언젠가 마티스의 작품이 보고 싶을  꺼내보면 바로   있겠더라. 하지만 그런 생각에 사온 다른 작가의 도록 한두개가 집에 꽂혀있기만   떠올랐다. 그리고 마티스 도록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방금 전시장에서  색감과는  달랐다. 당연하지. 촬영한  인쇄한 거니까. 그렇다면 이걸 펼쳤을  나는 마티스 전시회  직접 눈으로  아름다운 색감을 기억해낼  있을까 싶었다.

지금 내가 찍은  사진을 보자니, 그럼 저건 작품을 찍은 책을 찍어서 인화한 사진을 찍은 사진인 건가.


마지막에 출구로 나와 저쪽에   작품이 하나  있는  같아서  봤더니 요번에 발표한 신작이었다. 거리를 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쩐지 합성한  같이  어색하다 싶어 설명을 봤더니 ‘코로나 거리두기’로 인한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 이제야 아까의 인간군상이 빽빽한 작품들이 자꾸만 어색하고 낯설게 다가왔던  이해가 됐.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서울 여행을 나온 내가 유독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전에는 별 생각 없이 다니던 지하철이나 시장에서 계속 나의 심리적 안전 거리를 침범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코로나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거스키의 작품들을 팬데믹 이전에 봤다면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확연히 길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많아졌고 엔데믹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또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아지는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파도를 넘고 겪어 나간다. 오늘 나는 거스키의 작품 속 작은 하나의 인간이 되어 도심을 걷는다. 멀리서 보면 주변의 다른 이들과 비슷해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다르게 말이다.

202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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