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hkin Jan 15. 2017

정말 무스비로 모두 해결되는 걸까.

'너의 이름은.'이 안고 있는 문제들

  '너의 이름은.' 열풍이 한창입니다. 예전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한국에서 관객 300만 명을 동원하면 내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는데요. 본인은 300만 명까지 동원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다지만, 지금 추세를 보면 조만간 한국행 항공권을 구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의 이름은.'이 얻고 있는 인기가 너무 큰 나머지, '마스터' 등의 한국 영화가 주춤하는 것을 우려하는 기사까지 보입니다. '마스터'도 '너의 이름은.'도 본 제 생각으로는 그냥 '마스터'의 완성도가 낮아서 그런 것 같지만 말이죠.

  사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본 건 이번 '너의 이름은.'이 처음이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 시절부터 신카이 감독 팬이 많다고 들었고, '언어의 정원' 시절에는 이미 지인 중에서도 추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연이 없다가, '너의 이름은.'에서야 그의 작품을 보게 되었네요. 그래서인지 관람 전까지 굉장히 기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충격을 안고 나왔습니다. 

  워낙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신카이 마코토의 팬층도 꽤 두터운지라 이런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습니다. 심지어 제 브런치 첫 글이 될 글에서 말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기대 이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감독이 왜 그토록 인기를 끄는지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를 그리는 모습은 우리 마음 한 구석을 건드리는 곳이 있었고, 혜성이 분리되는 장면은 환상적이었습니다. 화면 구성은 탁월했고, 색감 또한 깔끔했죠. 일본에서 이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도 이해가 갔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재앙.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회삼아 조금이라도 그 결과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2011년의 재앙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일본 사람들 입장에선 이 메시지는 큰 울림으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지인이 사고로 돌아가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관람할 때 주의하라'는 평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의미가 있기에 더욱 저에게는 이 작품의 단점이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담을 만한 감독이 어째서 서사 구조에는 소홀했던 걸까. 


빠져 버린 서사의 고리 


  감독의 전작들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이 감히 평가를 내리는 것은 성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은, 적어도 서사 구성만 보자면 그다지 탄탄하지 못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고리 몇 가지가 빠져 있기 때문인데요. 

  첫 번째는 두 사람의 날짜 감각입니다. 작중 내내 두 사람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삽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날짜 한 번을 확인할 생각을 못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장면까지 나오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이 두 사람은 핸드폰의 메모 앱을 통해 서로에게 메시지를 남길뿐, 전화나 문자를 통해 연락을 취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에는 몸이 뒤바뀌었을 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묘사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몸이 뒤바뀌었을 때 자신의 핸드폰으로 직접 연락을 시도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테죠.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대체 왜 서로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단점만을 바라보던 타키와 미츠하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서로를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미츠하는 대뜸 눈물을 흘리고, 타키는 각종 자료를 수집해 가며 미츠하의 마을에 대해 추적합니다. 하지만 작품 그 어디에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지점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무스비'입니다. 얽히고설키며 이어지고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는 무스비는 사람 사이의 인연, 관계를 의미합니다. 일본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겁니다. 붉은 실로 이어진 두 사람은 하늘이 정한 인연이기에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이죠. 타키와 미츠하의 인연도 이 붉은 실, 무스비로 이어졌다는 것이 작품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초반에 서로를 너무나도 싫어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었는지를 그저 무스비로 설명한다면 너무 허술한 대답이 아닐까요. 인연이라고 넘어가기엔 처음에 서로를 너무 경계했고, 시간이 해결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당황스럽습니다.


감독의 시선이 머문 자리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신카이 감독은 왜 미츠하의 몸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지 의아합니다. 작품 내내 꾸준히 등장하는 가슴 만지기가 대표적인 예인데요. 처음 몸이 뒤바뀌었을 때야 자신의 상황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하고, 사춘기를 겪는 두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성의 몸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건 한 번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왜 유독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가 가슴을 주무르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요츠하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만지는 언니를 보고 '자기 가슴이 그렇게 좋으냐'고 말할 즈음에는 불쾌한 코미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가슴 만지기' 장면은 햇빛에 빛나는 미츠하의 몸을 유독 세밀히 묘사하는 장면, 농구 경기 도중 강조되는 미츠하의 가슴 움직임, 그리고 자전거로 산길을 올라갈 때 굳이 미츠하의 속옷을 보여주는 장면 등과 맞물리면서 감독이 창조자로 남지 않고 카메라를 빌려 미츠하의 몸을 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합니다.

  '초속 5센티미터'부터 팬층을 두텁게 확보하고 있는 감독인 만큼, '너의 이름은.'으로 신카이 감독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의 이름은.'의 감성과 화면 구성에는 저도 공감한 만큼 더 큰 역량을 지닌 감독이겠지요. 다음 작품에는 보다 만족스러운 작품을 선보이기를 기대합니다.


*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두 주인공의 이름은 '다키'와 '미쓰하'로 써야 맞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배급사의 자막을 따라 '타키'와 '미츠하'로 표기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