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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03. 2016

관계의 시작, 관계의 종말

- 왕따를 걱정하는 부모들

‘일이 힘든 건 참아도, 사람이 힘든 건 못 참는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업무보다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 직장인들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일’을 목적으로 모인 직장만이 아닙니다. 명절이나 가족 대소사를 치를 때 일 자체의 문제보다 친척간의 미묘한 갈등이나 의견차이 때문에 불편했던 경험을 가진 분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은 학교를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게 학교는 ‘생활’입니다. 중학교 아이들은 하루 평균 7시간 이상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그 외 모든 시간의 기준점도 역시 ‘학교’입니다. 그런 학교생활에서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은 흔들립니다. 특히 중학생은 또래집단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지만 자기중심은 아직 덜 잡힌, 외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혼란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중학생 아이들에게 ‘관계’는 모든 것이 됩니다.     


한 학교에 두 명의 왕따가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비공식적인 한 명의 ‘은따’와 공식적인 ‘재수 없는 년’ 한 명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은따였던 천지가 죽었습니다. 굵게 짠 빨간 털실로 문지방에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일기도 유서도 남기지 않은 죽음이었습니다. 

“천지를 돌아오게 할 순 없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은 찾아내야지.”

언니 만지는 동생이 남긴 다섯 개의 봉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천지가 남긴 다섯 개의 실타래, 그리고 다섯 개의 편지들. 천지는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무엇이 천지로 하여금 그토록 쓸쓸하고 아픈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애들이 자꾸 나만 술래 시켜.”

“안 한다고 해.”

그렇게 얘기해봤어요, 엄마.

“그래도 자꾸 시켜.”

“그럼 걔들이랑 놀지 마.”

그럼 나는 누구랑 놀아, 언니?

그날부터입니다. 친구에 대해 더 이상 엄마와 언니에게 상의하지 않게 된 때가.  (20쪽)


또래 아이들이 천진한 겉모습 뒤에 숨어 벌이는 영악한 행동들. 다툼과 공격에 익숙하지 않아 그냥 참아버리는 순한 아이들이 일차 공격대상이 됩니다. 견디다 못한 아이가 울어버리면 여럿이 한 사람을 바보 만드는 놀이. 우린 그냥 너하고 논 거야... 일방적이고도 일방적인 놀이. <톰과 제리>에서는 약자인 제리가 어리숙한 강자 톰을 놀리고 쉽게 위기에서 탈출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찍힌 희생자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날 때까지 코너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아이들은 잔인한 놀이에 쉽게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잔인해집니다. 괴롭히는 아이도,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화연이 천지를 괴롭히는 것을 은근히 즐기며 구경하는 아이들. 천지를 괴롭히던 화연도 결국은 아이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던 어릿광대에 불과했습니다. 


자살한 천지 외에도 또 한 명의 왕따, 미소가 있습니다. 요즘 애들 말로 천지는 ‘은따’(은근한 왕따)였고, 미소는 대놓고 왕따였습니다. 미소는 왕따를 당하자 스스로를 아이들로부터 소외시키고 폭탄이 되었습니다. 미소가 처음부터 ‘재수가 없는 아이’였는지, 아니면 ‘재수 없다’는 말이 붙으면서 진짜로 재수가 없어진 건지, 이제는 알 수 없어졌습니다. 지금 미소는 모든 아이들이 싫어하는 아이, 그리고 싫어할만한 행동을 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미소는 ‘무시’라는 딱딱한 갑옷을 입음으로써 무차별한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천지가 그나마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순둥이라면 순둥이요, 바보 같다면 바보 같던 천지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미소를 왕따시킨 ‘제법 노는 아이’에 비해 천지를 괴롭히고 왕따시키려고 했던 화연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작았습니다. 게다가 화연이 천지를 왕따시키려는 것을 매번 방해하고 천지 편을 들어준 미라가 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친구가 그래도 천지를 견딜만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진짜 웃음을 보여주었던 미라마저 돌아선 순간, 천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세상을 버렸습니다. 어쩌면 미라가 마지막에 올린 돌은 매우 작은 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층층이 쌓여진 돌의 무게를 간신히 견디고 있던 천지에게 그 작은 돌 하나가 마지막 한계였나 봅니다.    


천지를 괴롭히고 괴롭힘을 묵인했던 아이들이 천지가 죽은 후 제대로 후회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리고 미소를 껴안았다면...... 그러나 그런 결말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웠습니다. 천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찾는 아이들. 과거에 맞장구치며 함께 뜬소문을 떠들던 아이들이 이제는 화연에게 주목합니다. 네가 그랬어, 네가 천지를 괴롭혔잖아. 괴롭힘을 주도하거나 부추기거나, 지켜보거나 눈감거나 즐기거나, 결국 하나였던 아이들은 다시 하나가 되어 화연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갑니다. 세상이 무섭고 두려워진 화연. 지하철 까만 철로가 편안해 보인다고 느끼던 바로 그 순간, 화연을 잡아준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천지가 문지방에 자신이 짠 털실을 걸던 그 날도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아한 거짓말>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소개하지 않으려 했던 책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용을 알기 때문에 제가 굳이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흥행에 성공했고 저 역시 두 딸과 함께 펑펑 울면서 봤습니다. 엄마라서인지 저는 역시 김희애의 억척스럽지만 안쓰러운 엄마 연기가 제일 마음에 남았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이렇게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왕따’를 걱정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부모들이 ‘걱정한다’, ‘특히 방송이나 인터넷 등에서 왕따 문제가 다뤄질 때 많이 걱정된다’고 답합니다. 자녀 나이와 거의 상관없이 이구동성 같은 걱정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의 대답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왕따는 그 특성상 피해자는 소수이고, 가해자가 절대다수입니다. 주도자는 한 두 명일지라도 가해자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왕따를 당할까봐 걱정하지 왕따를 시키는 아이가 될까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내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집단 괴롭힘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지만 내 아이가 다른 친구를 따돌리는 주모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침묵하는 방관자 또는 암묵적인 동조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친구들끼리 싸워도 맞고 오지 말고 (치료비를 물어줄지라도) 때리고 오라고 가르치던 것의 연장선일까요? 


저 또한 그런, 내 자식만 걱정하던 엄마였나 봅니다. 특히 중학생 큰아이는 교우관계가 좋고 성격이 좋다고 칭찬받는 아이였기에, 한 번도 내 아이가 왕따의 동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늘 그렇듯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교복도 벗지 않고 간신히 손만 씻고 채 식탁에 앉았습니다.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엄마, 오늘 진짜 웃긴 일 있었어요.”

“뭔데?”

“지연이 진짜 웃겼어요.”

“왜?”

“요즘 은희가 세희랑 같이 밥 먹거든요. 지연이 얘기로는 세희는 우리랑 먹고 싶은데 은희가 같이 먹자고 하니까 거절하지 못하는 거 같대요. 오늘 점심시간에 은희가 저한테 말을 걸어서 얘기하고 있는데, 지연이가 세희 불러서 둘이 얘기를 했나 봐요. 그리고 둘이 들어오면서 저를 쳐다보면서 윙크를 하더라구요. 저는 갑자기 웃음이 나오고 은희는 어리둥절해 하고... 상황이 정말 웃겼어요.”

“지연이랑 세희랑 무슨 얘기를 했는데?”

“우리랑 같이 밥 먹고 싶냐구요. 세희도 그러곤 싶은데 은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나 봐요. 지연이는 은희랑 절대 같이 밥 안 먹잖아요.” 

(은희는 큰아이가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같은 반 아이입니다. 학교나 친구들에 관한 크고 작은 불평이나 불만을 늘어놓을 때 가끔 이름이 등장하는, 저도 기억하는 아이입니다. 지연이는 큰 아이하고 꽤 친한 같은 반 친구구요. 물론 두 이름 모두 가명입니다.) 


평소처럼 아이들 사이의 자잘한 이야기려니 무심코 듣다가 멈칫했습니다. 순간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가장 소름끼쳤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화연이의 생일파티날, 3시에 도착한 천지에게 화연이가 말합니다.     

“2자를 쓴다는 게 또 3자를 썼나 봐. 천지야, 미안해.”

“그랬구나.”

모여 앉은 아이들은 키득댑니다. 천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 먹어버린 생일상에 끼어 앉아 화연이 엄마가 추가로 가져다준 짜장면 한 그릇을 먹습니다. 조용히 짜장면을 먹는 천지 주변에서 아이들은 낄낄댑니다. 천지만 빼놓은 카톡방에서 자기들만의 놀이를 즐깁니다. 


영화를 본 큰 아이는 빨개진 눈으로 분개했었습니다. 그리고 생일상을 박차고 나오지 않은 천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었습니다. 기억을 떠올린 저는 딸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랑 같이 봤던 영화 <우아한 거짓말> 기억나니?”

“네?”

“거기서 화연이 생일잔치 하던 모습 기억나? 천지가 늦게 와서 혼자 짜장면 먹을 때 다른 애들이 모두 카톡하면서 키득대고 웃었던 거.”

큰아이는 대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를 챘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신나하던 아이는 잠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말을 잇는 아이의 목소리는 아까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일부러 은희를 왕따시킨 것은 아니예요...”

“그래, 엄마도 우리 딸이나 지연이가 은희를 일부러 왕따시키려고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데 다들 웃는데 혼자만 이유도 몰랐던 은희는 기분이 어땠을까? 엄마는 은희가 자신이 놀림 받고 있는 거 눈치 챘어도 모른 채 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사실을 은희 엄마가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한 번 생각해봐, 딸.”  


며칠 후 다시 한 번 아이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한 번쯤은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큰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고 합니다. 같은 반에 노골적으로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없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싫어하는 애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의 설명에 따르면, 모둠별 발표를 할 때는 혼자만 좋은 역할을 맡으려 하고 체육 시간에 실기평가 대결을 하면 이기려고 난리를 치면서도 수행평가에 들어가지 않는 반별 대항 시합*에는 잘 참석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이기적인 아이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아주 싫어하는 또 다른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선생님 하시는 얘기마다 토를 달아서 수업을 방해한다고 합니다. 주로 만만한 선생님들에게요. 시험이 끝나면 (자신이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다른 아이의 점수를 알아내려 기를 쓰고, 시험기간이 끝나고 나면 같은 반 아이들은 선생님께 ‘이번 한 시간만 놀자’고 조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혼자만 ‘진도 나가자’고 한답니다. 수학시간에는 선생님이 어렵냐고 물어보면 너무 쉽다고 큰소리로 외친답니다.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재수없는’ ‘관종’*이랍니다.


일방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두 아이 모두 다른 아이들이 싫어할 여지가 있는 아이입니다. 어른 세계에서도 이기적인 사람과 잘난 척 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는데, 감정에 솔직한 중학생 아이들이 이기적이거나 잘난 척 하는 아이를 대놓고 싫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나와 취향이 맞는 사람과는 쉽게 친구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똑같습니다. 전교생과 놀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모두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쟤는 착한데, 나랑 코드가 맞지는 않아요.’일 경우, ‘그냥 아는 아이’로 남습니다. 어울리는 친구들이 서로 다른 사이, 길거리에서 스치면 가벼운 눈인사정도를 나누는 사이가 되지요.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쟤는 되게 못 됐어요.’인 아이와 어떻게 같은 공간에서 지낼 수 있을까요? 정규 수업시간만 아침 9시에서 오후 4시, 하루에 7시간씩, 일 년 동안 좁은 교실에서 함께 지내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널뛰는 호르몬에 지배받는 요즘 중학생 아이들은 늘 입에 ‘짜증나’를 달고 삽니다. 그 짜증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과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그 경계는 너무도 희미합니다. 


“딸, 엄마는 너희들이 은희를 싫어하는 것은 이해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엄마도 회사 다닐 때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한 번 싫은 사람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계속 별로야.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잖아. 그런데 은희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괴롭히는 것은 너희 말로 ‘클라스’가 달라. 절대적으로 별개의 일이란다. 내가 누구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괴롭히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야. 또 괴롭힌다는 것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하는 문제고. 전에 엄마랑 성희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 있잖아? 성희롱이나 학교 폭력이나 가해자 입장에서는 ‘장난’이지만, 당하는 사람은 절대 ‘장난’이 아니지. 엄마가 너무 오버하는 걸 수도 있는데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 엄마는 우리 딸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엄마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엄마가 지나치게 걱정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일단 걱정하시는 것은 잘 알겠어요. 전 지연이처럼 은희를 무시하진 않지만 그래도 걔는 별로예요. 앞으론 지연이를 좀 말려볼께요. 지연이가 지나치긴 해요.”

“엄마 말 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 후 은근슬쩍 한 번씩 은희 이야기를 물어보게 됩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이 쓰이기도 해서요. 다행히 은희와 아이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은희는 여전히 나서길 좋아하는 것 같지만 함께 밥 먹는 아이도 있고 지연이는 여전히 은희를 좋아하지 않지만 전처럼 사사건건 은희 말을 자르거나 타박을 놓지는 않는 듯 합니다. 학기 초에 지연이랑 가장 친했던 딸아이는 요즘 더 친한 다른 단짝이 생겼습니다. 지연이는 말을 너무 마구 해서 좀 불편하다는 군요.  


어린 아이들은 기르는 애완동물이 죽었다고 펑펑 울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가지고 노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곤충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회색 보도블록 사이로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발로 으깨고 개미들이 들어가던 작은 흙 구멍에 물을 부어놓고 좋아라 박수를 치고, 잠자리를 잡아 놀다가 날개를 따 버리고 내팽개칩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말이지요. 병아리가 나는지 보고 싶었다며 아파트 베란다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릅니다. 나와 다른 ‘꼬물거리는 그 물체’들이 나처럼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노는 병아리에게  엄마닭이 있고 내가 괴롭히는 친구에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툭툭 건드리고 다니는 같은 반 아이도, 내가 ‘재수 없어’ 하는 같은 반 아이도 누군가에게는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슬프고 아프고 좌절하고 상처받는, 나와 똑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명제를 종종 잊어버리는 것에서 많은 문제들이 시작됩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대인관계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메마르고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 줄어든다고 느껴질수록 더 소중해지는 가치입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한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고 공감 받고 싶은 우리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자신의 감정을 존중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공감 받아본 사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다양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그 감정이 온전히 수용되는 경험들은 사춘기 아이들이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삶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소중한 경험을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는 바로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존중받고 공감 받은 아이가 타인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갓난아이는 항상 웁니다. 배고파도 울고 기저귀가 축축해도 웁니다. 놀라도 울고 무언가 불편하면 우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표현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지 아시나요? 청소년들은 화내거나 짜증을 냅니다. ‘아, 열 받아’, ‘아, 짜증나.’ 사춘기 아이들의 입에 붙은 말들입니다. 우울하거나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속상하거나 답답하거나 낙심하거나 긴장하거나 두렵거나 괴롭거나... 이 모든 감정을 분노와 짜증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에게 허용된 감정표현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가 울 때 부모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이를 달래줍니다. 우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안고 달래고 어릅니다. ‘아이구, 배고파? 오줌쌌어? 놀랐어? 졸리워?..’ 등등 갓난아이의 감정을 추측하고 호응해 줍니다. 모든 감정이 수용된 아기는 편안해집니다. 다시 방글방글 귀여운 아기로 돌아갑니다. 기쁨, 분노, 슬픔, 공포 같은 기초적인 정서는 타고 나는 것이지만, 다정함, 충만함, 만족감, 희열, 심취, 분개, 경멸, 질투, 고통, 죄의식, 외로움, 걱정 등 2차적인 정서는 지속적으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발달하는 감정들입니다. 우리 안의 다양한 감정들은 피하거나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들여다보고 세심하게 이름 불러줄 때 편안해집니다. 상담가나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잘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게 되면서 비로소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수용하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은 받아주되 행동은 제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공감 받은 아이는 점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이 표현하는 모든 긍정적, 부정적 정서를 받아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을 만드는 것, 이것이 아이들과 공감하는 부모가 되는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함께 읽은 책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창비, 2009      

<청소년 감정코칭> 최성애, 조벽  해냄. 2012

                                                                                                                                                                  

* 요즘 중학교에서는 ‘스포츠 리그’라고 해서 학년별로 구기 종목을 정해서 반 대항 경기를 합니다. 학기별로 우승팀도 뽑고 우승팀에게는 간식비도 주지요. 싫어하는 아이도 물론 있지만 반 아이들 간의 유대감을 키워주고 운동도 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합은 수업 전 이른 아침시간이나 토요일 오전에 열립니다. 강제 참석은 아니지만 경기 인원이 부족하면 기권패가 되기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 등쌀에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서로서로 참석을 확인하고 모이는 분위기입니다

* ‘관종’은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종자’의 약어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우스꽝스럽거나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아이들 세계의 은어입니다. 

“야, 걔 관종 아냐?”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데, 중학생들한테는 심한 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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