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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08. 2018

'착한 사람이 재앙을 만나는 이유'

[사기열전] 사마천_(1)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런 것인가?’    [백이열전, p.65] 



  사마천은 자연환경과 문화적 특성의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은 바로 사람에게 있다고 보고 인물중심의 <사기>를 집필했다. 특이한 점은 제왕이나 고관대작 등 역사상의 위대하거나 유명한 인물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객과 좀도둑, 상인 등 사회적으로 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직업이 등장하고 실패하거나 별 영향력이 없었던 인물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사마천은 인물을 기록할 때 현실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인, 그리고 의를 중요시여기고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이상세계를 염원하는 유가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서양의 객관적(?)인 역사기술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들에 의해서 <사기>는 사마천 개인의 평가와 감정이 들어갔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이런 기술방식이 <사기>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다양한 국가에서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가 된다. 또한 <사기>는 역사서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저자의 개성과 자유로운 문체, 그리고 해당 인물에 대한 생생하게 살아있는 묘사를 통해 전기(傳記)문학으로서의 가치도 탁월하다.  

 

  각 편의 소제목과 해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붙인 것이다. 각 소제목은 그 자체가 해당 편의 줄거리이자, 사마천의 주장을 압축, 소개하고 있어서 책을 읽는 당시에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 읽은 후 다시 찾아보기에도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된다. 또한 각 편의 해제는 ‘고전읽기’라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여정에서 주인공들과 시대적 상황, 그리고 저자인 사마천의 평가를 연결해 주는 좋은 도우미가 된다. 또한 해제 자체가 중국 문학 전문가이자 저술가인 역자의 좋은 텍스트로서 의미가 있었다.     

 

  열전의 구성 자체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감동을 배가하기 위해 주제와 등장인물의 특징에 따라 쓰여 있어서 800쪽이 넘는 책이지만 읽기가 아주 쉬웠고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후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태사공은 말한다.’라는 독특한 형태로 첨부하여 객관적인 역사와 자신의 의견을 분리하여 기술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사기열전>이 갖는 최고의 미덕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탐구에 있다. 한 편 한 편을 읽어보면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 비극을 냉정한 현실 인식으로 승화시켜, 그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을 조망해 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과연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사기열전>이 이토록 진한 감동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세상은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그 시대와 천지가 개벽할 만큼 달라졌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의문은 여전하다. 사마천은 이 책의 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면서도 단순하고 획일적인 답변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섣불리 당위론적 사고를 내세우는 것도 비판하고 있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런 것인가?’ [백이열전, p.65] 


  사마천의 이 질문은 <사기열전>전체를 끌고 가는 화두이며, 잘못된 길을 가지 않고도 엄청난 재앙을 받았던 자신의 일생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또 다른 숙제이며, 이런 질문을 품게 된 것이 바로 <사기열전>을 읽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사기열전] 

 (원제: 史記列傳 / 사마천 司馬遷, 김원중 옮김) 




*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은 용문(현 섬서성 한성현) 출신으로 출생과 사망년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대략 한 경제 5년, 즉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대략 한 무제 3년, 즉 기원전 90년경까지 약 58세를 산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나라가 건국한지 약 60여년이 지나 경제가 완전히 회복하고 국력도 상당히 강성해진 때였다. 이런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무제는 국내 정치에서도 유가 사상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의 주목표는 지방에 할거하던 제후국의 세력을 줄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황제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소금, 철기, 동전 주조 등 중요한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한편 각종 경제정책과 교육정책을 개편했다. 또한 주변 이민족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한나라의 위세를 과시했다.  


  한 무제의 시대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전성기였지만 그 이면에는 계속되는 전쟁과 노역, 그리고 통치계층의 사치와 낭비로 인한 일반 백성의 엄청난 고통이 있었으며 황제권력  강화정책이 독재정치로 이어져 조정대신은 물론 황후와 태자까지 한 무제의 눈에 벗어나면 바로 죽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절이기도 했다.  

 

  사마천의 선조들은 주나라 왕실의 역사기록업무를 담당했던 사관을 역임했으나 주 왕실이 몰락하면서 대대로 세습되던 가업도 단절되었고,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한나라의 태사령(천문과 역법,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에 봉직하면서 다시 역사가로서 가문의 전통이 이어진다. 사마담은 약 30여 년간 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이미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사기>를 집필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인 사마천에게 자신의 과업을 이어줄 것을 유언한다. 이때 사마천의 나이가 36세였다.   어려서부터 한자보다 더 어렵다는 옛문자(고문)을 익히고 아버지로부터 사관이 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을 받아오던 사마천은 20세 때 우왕과 순임금의 묘를 비롯하여, 굴원이 투신한 곳, 항우와 유방의 격전지 등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다니며 그때의 감회를 기록하는 긴 여행을 했으며, 이때의 여행을 후대에 ‘독만권서 행만리로 讀萬卷書 行萬里路’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했다는 뜻)라고 일컫는다.   사마천은 약 3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행에서 돌아와 27세에 황제의 비서관 역할을 하는 하급관리인 낭중에 올랐으나, 크게 두각을 보이진 못하고 십여 년 동안 줄곧 낭중에 머물렀다.  

 

  아버지의 죽음 3년 후, 사마천은 아버지가 맡던 태사령을 계승하여 직분을 수행하는 한편, 아버지가 남긴 원고들을 정리하며 글을 쓰는데 매진한다.   그러던 중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패하고 투항한 이릉을 두둔하여 무제의 노여움을 사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가난한 사마천은 사형을 면제받기 위해 50만전의 돈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치욕의 궁형을 받게 된다. 이 때 사마천의 나이는 47세, 기원전 99년이다.   절친한 친구 임안마저 자결을 택하지 않은 사마천을 비난하였으나 사마천은 유명한 <보임안서>에서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노예나 비첩 같은 존재들도 오히려 자결할 줄 아는데 하물며 내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치욕을 참고 견디며 더러운 흙 속에 뒹구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내 마음속의 소원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비루하게 살다가 죽을 경우 나의 글이 후세에 남겨지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네.    이제 내가 저술한 이 글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내가 이전에 당했던 굴욕이 보상되리라고 믿네. 이제 더 참혹한 형벌을 당한다 할지라도 어찌 후회됨이 있겠는가?” 

 

  이러한 사마천의 다짐은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간과 나무를 깍아 만든 목간에 총 52만 6천 5백자의 한자로 쓰여진  필생의 역작 <사기>로 드러났고, 사마천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가볍게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지켰다.  

 

  사마천의 <사기>는 황제로부터 한 무제에 이르는 약 3천년을 기록한 통사이다. 제왕을 기록한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제도를 정리한 8서, 제후를 기록한 30세가, 의롭거나 탁월한 인물을 기록한 70열전, 이렇게 다섯 가지 형식을 유기적으로 엮어 총 130편으로 묶었다. 기존의 역사책은 연도별로 기록하거나 사건 위주로 정리한 데 비해 <사기>는 인물 위주로 기록하여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뽑아 ‘기전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저술 방식은 그 후 대대로 계승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고려사>같은 역사서도 모두 기전체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기원전 90년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 참고> 중국의 고대 왕조 

1. 삼황 시대 - 신농씨, 복희씨, 수인씨가 다스렸다는 신화와 전설의 시대 

2. 오제 시대 - 전설적인 다섯 임금이 통치한 황하 문명의 성립 시기 

3. 하왕조 (B.C. 21C~B.C. 16C) -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중국 최초의 왕조 

4. 은왕조 (B.C. 16C~B.C. 11C) - 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물을 보여주는 갑골문자의 나라 

5. 주왕조 - 천명사상과 왕도 정치 이념으로 건설된 봉건제 국가 

    5-1. 서주 시대 (B.C. 11C~B.C. 770년) -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주나라 

    5-2. 동주 시대 (B.C. 770년~B.C. 256년) -제자백가가 활약했던 춘추 전국시대 

6. 진왕조 (B.C. 221년~B.C. 206년)-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7. 한제국 (B.C. 206년~A.D. 5년) - 유학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번영을 이룩한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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