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를 열심히 읽는 엄마를 보고 고등학생 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그 책 재미있어요?"
"엄청 재미있어! '빅 히스토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번 겨울 방학을 기다려 아이도 <사피엔스>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글도 잘 읽히며 재미있고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시니컬하고 비판적이면서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태도가 책 전반에 걸쳐 배어 나온다는 점에서 엄마와 아이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더 깊게 배우고 연구하려고 해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전공이 역사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전공한 후 사람을 위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이런 이유로 역사학과 지망생인 아이는 <사피엔스>가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어 더욱 좋았다고 말합니다. 역사상 전쟁과 혁명 대부분은 식량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지적 등, 당연하게 생각했던 역사 서술의 많은 부분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고민했던 역사적 '사실'과 역사 기술의 '관점'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고,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주제의식에 <사피엔스>가 매우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급변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가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재해석하게 만들었다는 평가입니다. 역사란 고리타분한 과거의 해석이 아니며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선택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는 것, 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해 준 책이었다는 총평입니다. 이 정도면 고등학생의 독서평으로 썩 괜찮은 편입니다.
<사피엔스>에서 고등학생이 고른 인상 깊은 구절입니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 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 그 순간 이후 인류는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뿐 아니라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엄마가 이 책에서 주목한 질문은 '호모 사피엔스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이토록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입니다.
2015년, 전 세계가 주목한 질문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21세기 인류에게 이 질문을 던졌고, 역사와 과학을 종횡무진하며 스스로 답을 했습니다.
'칠만 년 전의 인지 혁명과 일만 이천 년 전의 농업혁명, 그리고 오백 년 전의 과학혁명을 거친 사피엔스는 현재 기아와 전염병과 전쟁을 극복한 최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창조되고 공유된 ‘가상의 실재’를 믿음으로써 대규모의 협력과 통합이 가능해졌다.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모순을 지니며, 이 모순을 중재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문화는 발전해왔다. 자본주의, 제국이라는 정치원리, 보편적 종교의 결합으로 인류는 근대시대를 열었으며, 거대한 흐름으로 볼 때 역사는 점차 통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현대 과학은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도전을 벗어난 신성한 대상이 아니라고 전재하였고 관찰과 수학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인류는 이로써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과 함께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이 막강한 능력으로 인류는 가난, 질병, 노화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로 끌어내렸다. 생명공학, 유기물과 무기물의 결합인 사이보그 공학, 인공지능 같은 비유기물 공학의 발달로 인간은 자연선택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입니다. 인류는 신이 되고자 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며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인류는 이 막강한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우리가 가진 역량의 증가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는가?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무엇이 진정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과학은 우리에게 그것으로 무엇을 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과학은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제한된 자원을 끌어오려면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좋은가”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지만 과학은 이런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과학은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할 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미래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답을 주지 못합니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종교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기존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욕망이라고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것조차 사실은 기존 ‘상상의 질서’의 산물일 뿐이라는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쉽게 욕망에 휩싸이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물질세계에 뿌리를 내린 ‘상상의 질서’와 지배적 신화에 의해 욕망의 형태가 결정되고 낭만주의와 소비지상주의의 결합은 현재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며, 애초에 우리로 하여금 그 피라미드-개인의 욕망-를 욕망하도록 만든 신화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의 욕망 앞에서 멈추고 스스로 질문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인류가 다다른 갈림길에서 사피엔스 전체가 함께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진실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우리는 진정 무엇을 바라고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는 이 막강한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지구 전체의 고통을 말하는 저자는 산업적 가축사육을 거센 어조로 비판하면서 채식주의자임을 선언합니다. 질문하는 동시에 행동하라고 우리에게 조용히 압력을 넣습니다.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채식주의자로 살 수 없는 저는 먹는 양이라도 줄여야겠다는 소심한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p.10)
덧붙이면,
1) 석기시대는 실제로는 목기시대일 것이라든가, 농업혁명은 ‘거대한 사기’라든가, ‘가능성의 지평’ 같은 표현들과 인간 조직의 결정적 임계치가 ‘마법의 숫자, 150명’인 이유에 대한 설명 등은 신선했습니다. 애니미즘, 일신교와 이신교, 다신교, 인본주의적 종교 등 종교에 대한 설명은 일목요연하고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2)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흥미로웠습니다.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며,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저자는 행복은 쾌락적 감각을 추구하는 생화학적 시스템의 결과나 자기기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삶의 의미’에 대한 주관적 추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행복은 이런 주관적 안녕에 대한 추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행복을 얻는 것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이 비파사나 명상을 하루 2시간씩 수련하고 있다고 밝힌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4) <사피엔스>는 엄청나게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진 것에 비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러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로 문을 열고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로 불을 지핀, 인류사-빅 히스토리가 엄청난 관심을 얻고 있는 것은 그동안 민족이나 국가 중심의 역사와 다른 시각으로 현재 인류가 처한 전지구적 의제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제기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유발 하라리는 정확한 질문을 던졌고 ‘지구 제국’이라는 어렴풋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과연 지구 공동체는 인류의 해결책이 될 것인가? 이제 우리가 대답을 찾아야 할 차례입니다.
5) 유발 하라리는 한 인터뷰에서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것”을 도덕의 핵심이라고 정의하고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의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우리 개인의 존재와 삶의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싶다면 알고리즘보다 아마존보다, 정부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그들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학자를 넘어 영적 탐구를 추구하는 구루가 될 것인가, 앞으로 하라리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경향신문, 2018/9/8, 신간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인터뷰에서)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