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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22. 2015

아이의 상처를 대하는 두 가지 자세

<유진과 유진>  이금이, 푸른책들, 2004

“엄마, 신입생들이 왔는데 완전 어리버리해요.”


개학식에 다녀온 아이의 말에 난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뭐가 그리 어리버리해?”


“어리둥절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교복도 자켓까지 다 챙겨 입고...”


선배들 무섭다며 매점 구경도 못 가던 작년의 아이가 떠오른 나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한다고 중학교 2학년이 된 아이들은 긴장했던 자신들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능글능글 어른이 된 척하는 아이들.


운동장에서 개학식을 하고 들어온 아이들에게선 갓 솟아오른 햇덩이처럼 환하고 순진했던 1학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교복의 소맷부리처럼 약간은 닳았으며 치마의 엉덩이 부분처럼 조금씩은 뺀질뺀질해진 모습으로 2학년이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의 어떤 괴담과 전설에도 놀라지 않으며, 선생님들의 경고와 기합에도 굴하지 않는 중고참이 된 것이다. (8쪽)



그들은 과연 얼마나 자란 걸까?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된 두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성과 이름만 같을 뿐 외모도, 성격도, 성적도 정반대다.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던 두 명의 유진이 점차 동일한 상처를 가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같은 유치원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함께 겪었지만 그 이후의 과정이 달랐다. 그래서 그들의 변화도 다르다.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면 엄마도 죽고 너도 죽는 거야'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나를 비난하지 마! 차라리 내 행동으로 나를 비난해!’

아이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작은유진의 부모는 도망쳤다. 그리고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딸에게도 잊으라고 강요했다. 엄마가 자신 때문에 죽을까 봐 무서워서 작은유진은 직접 겪은 일을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벽이 되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작은유진은 부모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사랑해, 사랑해.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넌 미친개에게 물린 것뿐이야'

큰유진의 부모는 아이를 끌어안고 함께 울고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한 유치원 원장을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 다른 부모들과 힘을 모았다. 아이의 상처는 가족 모두의 상처였지만 바람도 쐬어주고 햇볕도 쪼여 주면서 그들의 상처는 함께 아물었다. 그래서 큰유진에게 상처는 무릎위의 흉터로만 남지만... 


상처를 주는 것도, 치유해 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나쁜 사건 자체보다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더 상처받는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상의 댓글보다 같은 반 친구들의 반응이 중요하고, 단짝 친구의 반응은 더욱 중요하다.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가끔 의심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가장 깊게, 가장 오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쉽지만 또한 세상에서 상처받은 아이를 제일 먼저, 가까이서 만난다. 


부모가 세상의 나쁜 일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아이를 유리온실 속에서 기를 수도, 울타리 안에 가둬둘 수도 없다. 헬리콥터처럼 아이 주변을 맴돌며 아이 앞의 진흙탕을 메워줄 수도, 아이 앞에 등장한 장애물을 뭉개줄 수도 없다. 경기장의 코치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지시를 내릴 수도 없다. 맞고 온 아이 대신 쫒아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를 수도 없다. 때로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을지라도. 


한국 부모들만의 유난이 아니다. 딸이 남자친구와 첫 데이트를 가는 뒷모습을 보며 총을 들고 따라가고 싶은 자신을 꾹 누르고 딸이 무사히 귀가할 때까지 안절부절 걱정을 했다는 미국인 아빠의 이야기. 쓴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는 공통된 부모 마음이다.


상처받은 아이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항구가 되어주는 일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내 품에 안겨 울며 쉴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단단히 있어주는 것이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도울 뿐이다. 상처로 다시 날개를 짓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우리 아이들을 힘껏 격려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바라봐주는 것이다.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가끔 구름이 하늘을 가려도 그 뒤엔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알고 있듯이, 오늘 해가 져도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의심치 않듯이, 아이가 그렇게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작은유진은 부모와 함께 있는 공간 속에서도 차가운 강물이 흐르는 외로움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작은유진과 달리, 큰유진이 망설이지 않고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돌아올 자신을 기다리고 반겨줄 부모를 믿기 때문이었다. 태풍이 칠 때 쉬어갈 수 있는 항구를 믿기 때문이다.


부모도 상처로 어른이 된다

모든 부모는 완벽하지 않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의 내면도 자란다. 맞선으로 만나 후다닥 결혼했던 큰유진의 부모는 아이의 상처와 극복과정을 함께 겪으며 진짜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었다. 더 큰 사랑을 만났고 분명 삶도 사랑도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작은유진 부모는 아이의 상처에 좌절했고 떠나왔던 과거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부모의 외아들이었던 아버지와 짐만 되는 친정식구들 사이에서 버거워했던 엄마는 아이의 상처를 견디지 못했고 더 큰 자신들의 상처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열렬했던 부부 사이도 갈라놓았다.


“시작은 누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지. 살면서 받는 상처나 고통 같은 것을 자기 삶의 훈장으로 만드는가 누덕누덕 기운 자국으로 만드는가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아.” (195쪽)


<유진과 유진>이 부모들에게 던지는 또 다른 질문들



1. 아이들의 현실, 안타깝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두 명의 유진처럼 충격적인 사건을 겪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중학교 2학년이 짊어진 중압감. 이 무게는 앞으로 최소 5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더 무거워질 것이다. 작은유진처럼 어느 순간 확 집어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들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 같다. 그 때문에 대학에, 그것도 부모님이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하면 제값을 다하지 못한 사람인 양 취급받는다. (18쪽)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이 시간쯤엔 발걸음과 등에 매달린 가방은 물론이고, 마음, 눈꺼풀까지 무겁지 않은 것이 없어 그림자까지 내가 끌고 가야 하는 짐처럼 여겨진다. (22쪽) 


**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중에서)

퇴근 후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으로도 빼놓지 않고 아이 발치에 앉아 부르던 노래였다. 조그만 아이의 발과 다리를 꼭꼭 주무르고 매만지며 중간중간 아이이름을 넣어 불렀다. 간지럽다 키득대는 아이의 발바닥에 뽀뽀를 하고 노래를 불러주면 아이는 스스륵 잠이 들고 내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의 발을 주물러주며, 너의 존재자체로 기뻐하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아이가 크는 만큼 욕심도 딱 그만큼 자란다. 무섭고도 무서운 일이다. 혹시나 당신의 욕심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은유진이 물어본다.



2. ‘그런 애’라고?!  나는 그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을까?


사건이 터졌을 때 유치원 원장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앞장서서 도왔던, 남의 일도 내 일처럼 나서서 해결해 주는 좋은 아줌마가 있었다. 큰유진의 남자친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자신의 부모, 특히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 같다는 엄마였다. 그녀는 청소년 상담소 소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건우엄마는 자식과 연결되는 순간 돌변한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다 알아도 내 아들이 ‘그런 애’를 사귀는 건 싫다는 ‘어른’의 위선.


우리는 모두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숨기며 살아간다. 단짝친구 큰유진의 성적이 많이 올랐을 때 억지로 기쁜 척을 했던 소라나 자신이 건우와 싸웠을 때 남자친구와 낄낄대는 소라를 순간이나마 얄미워했던 큰유진도 그렇고, 사람들은 모두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고 살지는 않는다. 작은 위선은 ‘선(善)’에 대한 동경과 최소한의 존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소 말하고 행동하던 주장을 자신의 경우 망설임 없이 내팽개치는 건우엄마. 그녀의 이중인격. 우리는 그녀와 다른 어른일까? 



3. 아이들 필독서는 고리타분하다고?


<유진과 유진>은 학교 필독서는 고리타분하거나 아이들의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선입견을 단번에 뒤집어준 책이다. 기존 필독서 목록에 주로 등장하는 1920~30년대에 쓰인 우리나라 근대소설들과 외국의 고전들은 그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감정이입을 하고 동질감을 느끼기에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청소년들이 겪는 내적 갈등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불합리함과 부딪쳐서 증폭되고 이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간다.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양한 배경의 문학작품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만큼 지금 이곳의 또래 아이들의 고민을 읽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또한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일부 인터넷 소설에 열광하는 아이들에게는 보다 진정성 있고 재미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찾아주어야 한다.


 <너도 하늘말나리야>와 <밤티마을>시리즈의 이금이 작가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바로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이 된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것은 청소년만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든 어른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그리스 신화로 아이에게 말 걸기  "이카루스라고 들어봤니?"

- 프랑스 애니메이션 <이카루스> 포스터, 1989년작 -

‘이카루스’를 아냐고 자녀에게 말을 건네면 엄마도 그걸 아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서로 놀라며 대화하다 보면 아이들이 말하는 ‘이카루스’가 온라인 게임인 것을 알고 조금은 허탈해질지도(게임은 분명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인데 왜 청소년들에게 인기인 걸까). 게임의 슬로건 ‘하늘을 정복하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을 인용하며, 그리스 신화이야기를 나누어보자. 1949년 태양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소행성을 발견하여 ‘이카루스’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이 신화에서 따온 것.


황소머리 괴물을 가두기 위해 크레타섬의 미궁을 만들었던 디이달로스는 자신도 미궁에 갇히게 되자,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붙이고 하늘로 날아 탈출하였다. 이카로스는 새처럼 나는 것이 신기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은 채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태양열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에게해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동경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작은유진이 춤연습실 ‘이카루스’를 만나 왜 가슴이 설레었는지, 또 휘경언니가 갑자기 이카루스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존재임을 아이와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멋진 대화가 될 것이다.


“아카로스는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이룬 사람의 모습을 다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날아오르려는 꿈을 꿀 때는 그의 몸도 깃털처럼 가벼웠을 거야. 이카로스가 바다에 떨어져 죽은 건 태양 때문에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가 아니라, 꿈을 이룬 그의 몸이 더 높은 곳으로 날고 싶은 욕심으로 무거워졌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떨어졌을 거야.”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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