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도구,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들
“엄마, 수행평가 과제 출력해야 해요."
“엄마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손으로 레포트 써서 냈는데... 이젠 중학생도 숙제를 컴퓨터로 내네.”
“정말요? 정말 엄마 대학 다닐 때 컴퓨터 안 쓰셨어요?”
“그럼. 그땐 대학마다 손글씨용 레포트 용지를 팔고 하늘색 앞표지도 팔았다니까. 그 앞표지로 미팅으로 만난 남학생에게 학보 띠지도 만들어 보내고 했는데.”
“와, 정말 신기해요.”
“엄마가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1인 1PC가 아니었어. 거짓말 같지? 컴퓨터가 부족해서 신입사원들은 선배들 퇴근하고 나서야 컴퓨터를 쓸 수 있었단다.”
“그런데 어떻게 일을 하셨어요?”
“거래처랑 팩스 주고받고 전화하고 그랬지. 장부에 손으로 기록해서 계산기로 합계내고... 이십 년도 안 된 얘기라니까. 한 번 바뀌기 시작하니까 순식간에 변했지만.”
학교 과제는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컴퓨터로 작성하는 것이 당연하고 스마트폰이 손안의 장난감이 된 요즘 아이들은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흥미진진하게 엄마의 옛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은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늦추거나 막거나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해가 뜨는 것처럼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이 있지. 그럴 때 우리는 그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단다.” (147쪽)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 1990년대와 20여년이 지난 요즘을 비교해보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엄청나게 바뀐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세상은 많은 이들을 멘붕에 빠뜨릴 것이 확실합니다. 새로 생긴 것은 인터넷만이 아닙니다. ‘멘붕’도 생겼습니다. ‘안습’도 생겼고, ‘엄친아’도 생겼습니다. 된장녀, 초식남, 왕따, 냉무, 눈팅, 같은 신조어 뿐만 아니라, 차도남, 금사빠, 넘사벽, 모솔, 깜놀, 열공, 솔까, 은따, 전따, 생파, 생선, 답정너, 문상, 자삭, 컴싸 같은 줄임말도 생겼습니다. ‘개’ 또는 ‘캐’는 새로 생긴 강조 접두사입니다. 이런 말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고 유행하게 된 걸까요?
개구쟁이인 닉은 5학년이 되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학교생활을 신나게 즐겨왔던 닉은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쳤습니다. 바로 학교의 전설인 그레인저 선생님! 오랫동안 링컨초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신 그레인저 선생님은 사전 신봉자입니다. 닉은 선생님의 절대적인 사전 옹호에 반기를 들기로 작정합니다. 사전에 나오는 말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은 닉은 펜을 ‘프린들’(Frindle)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프린들’은 그래인저 선생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학교에 퍼집니다. 신조어 탄생을 막으려는 그레인저 선생님과 사전에 오른 말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닉과 친구들의 한판 대결! 결국은 전교생의 절반 정도가 수업이 끝나고도 벌칙을 받느라 집에 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들께 버릇없이 굴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아이들의 자유로운 탐색을 지지하는 닉의 엄마. 사실 문제는 새로운 말을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해롭지 않은 사소한 언어 실험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였지 않을까요? 학생들이 기존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어른들은 아이들을 막으려고만 합니다. 닉과 그레인저 선생님의 불붙은 ‘낱말 전쟁’은 흥밋거리를 찾던 지역신문을 거쳐 전국으로 퍼지게 됩니다.
‘프린들’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말들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소멸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언어도 변합니다. 사람도 변합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어를 둘러싼 세대 차이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숭늉세대와 자판기커피 세대, 아메리카노 세대의 구분. ‘레깅스’를 맞추기 위해 진땀 빼는 숭늉세대와 ‘스릉흔드’를 처음 듣는 숭늉과 자판기커피 세대, 그리고 ‘6백만불의 사나이’와 ‘매직아이’를 잘 모르는 10대 20대 아이들. 사실 저희 부부도 그 날 ‘스릉흔드’를 처음 들었습니다. 두 아이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엄마아빠, 스릉흔드 모르세요?”
엄마 아빠를 세상의 중심에 두던 아이가 어느 순간 ‘친구가 먼저’가 되고, 아이들이 어릴 땐 ‘건강하게만 자라주렴’ 하던 부모가 이것저것 욕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예쁜 내 보물’이 종종 ‘세상의 웬수’이거나 ‘내 업보’로 변하기도 합니다. 종종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 변할수록 변하지 않고 가치를 발하는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프린들 주세요>가 15년의 세월과 태평양이라는 먼 거리를 건너 2016년 한국의 학생과 부모에게 여전히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을 읽은 학생들은 개구쟁이 닉과 친구들이 재미나는 새 단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장면에 열렬히 반응합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방해를 물리치는 모습이 아주 신나는 모양입니다. 부모들은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역시 닉의 숨은 지지자였던 그레인저 선생님에게 가장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레인저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45년 동안 우주 왕복선을 보고, 달에 사람이 가는 것도 보고, 기상위성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건들은 분명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치관이 뒤집히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 또한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배웠던 많은 것들이 무용화 되었고 새로운 지식들을 다시 배워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폭풍 같은 변화 속에서 그레인저 선생님은 어떻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흘러간 시대에 묻힌 앞뒤 꽉 막힌 '꼰대'가 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그레인저 선생님은 ‘목적’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전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사전이란 아이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르치는 ‘도구’라는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도구로서 사전을 중요시했고 열심히 활용했지만 사전을 아이들보다 위에 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조성이 무엇보다 먼저라는 것을 잊지 않았던 그레인저 선생님. 새로 나온 사전이 ‘프린들’을 추가해서 넣었던 것처럼, 도구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질서와 권위가 아이들을 짓누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배운 생각을 실제 세상 속에서 실험하는 모습을 뒤에서 격려해 왔던 선생님. 그레인저 선생님은 선생님과의 힘겨루기로 시작된 닉의 작은 장난을 무시하지 않고 창조적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준 어른이었습니다. 그 어른 덕분에 닉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새학기가 되면 부모들은 내 아이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길 기대하고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개학 첫날 아이들이 돌아오면 엄마들 사이에서 전화와 카톡은 불이 납니다. 선생님에 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립니다. 그레인저 선생님은 많은 부모들이 바라는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열정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공부를 엄청나게 시키지만 배꼽 잡는 농담도 잘하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선생님. 직업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 아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전문성에 빛나는 선생님. 부모들의 바람과 다르게 모든 선생님들이 그레인저 선생님 같지는 않습니다. 부모들은 선생님들을 평가하고 아쉬워하고 답답해합니다. 하지만 닉에게는 숨은 지지자였던 그레인저 선생님뿐만 아니라, 끝까지 닉을 지지하고 격려한 부모도 있었습니다. 꾸중을 들을까봐 움추러든 닉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형식적인 규칙을 강요하는 어른들에게 화를 낸 엄마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닉이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을 때도 이에 들뜨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잡아주었습니다. ‘프린들’ 상표 덕분에 많은 돈이 들어와도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신탁으로 돈을 저금해두고 닉에게 여전히 잔디를 깎게 하고 용돈을 주었던 아빠도 있었습니다. 이런 부모와 선생님 덕분에 닉은 활기차면서도 예의바른 청년으로 자랄 수 있었고 부자임을 알게 된 후에도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도구와 목적을 헷갈리지 않았던 선생님과 부모 덕분에 닉은 삶의 도구와 목적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바라는 선생님의 모습과 아이들이 바라는 부모의 모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학교 입시를 넘어 고등학교 입시가 중학생들을 옭아맨 것이 십 년이 넘었습니다. 각종 특목고와 자사고가 이제 겨우 십대 중반이 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아이들은 중학생 때부터 내신 성적과 생활기록부에 전전긍긍합니다. 가정 수행평가 시간에 버섯을 어슷 써는 대신에 채 썰어서 감점을 당하자 칼을 잡았던 같은 조원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나누어 먹는 실습시간이 즐겁지 않은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무엇에 얽매여 살고 있는 걸까요.
최근 몇 년 사이 코딩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게임을 사는 아이로 키우지 말고 게임을 만드는 아이로 키우자”고 연설하고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가 초등 6년때 코딩을 시작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퍼지자, 한국은 사교육 시장부터 들썩거렸습니다. 2018년부터 소프트웨어교육이 정규교과목이 된다고 하자 일부 극성 학부모들은 벌써 과외를 시작하고 관련 학원들은 강좌 홍보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소프트웨어는 암기과목이 아니며, 체육처럼 재미있는 과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프트웨어 업계 인사도 있지만 자칫하다가는 영어에 이어 또 하나의 ‘필수적’ 사교육 코스라는 지옥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코딩을 가르치는 목적이 ‘컴퓨터적 사고방식’을 가르쳐서 일방적인 ‘디지털 소비자’로서 남이 만들어주는 것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만들고 활용할 줄 알게 하는 것이라면, 분명 미래세계에서는 꼭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외와 학원 같은 사교육으로 정말 그런 능력이 길러질 수 있을까요. 자칫하다가는 논술시험이나 토익시험처럼 시험을 위한 또 다른 스펙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들을 얽매는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되는 것은 저만의 우려일까요?
“새로 나온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만 하지 말고 (친구들과 가족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세요. 휴대폰을 갖고 놀지만 말고 직접 프로그램을 만드세요.” (오바마 미 대통령)
“함께 즐길 수 있는 뭔가를 내가 직접 동생과 함께 만들고 싶었다” (마크 저크버그)
그들의 말을 “함께”와 “직접”을 중심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방향은 명확해집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직접 해볼 수 있는 호기심과 도전정신, 실패를 즐길 줄 아는 여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즐거움과 자신이 만든 것을 주변과 나누는 마음. 이것들은 코딩 교육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모든 교육의 목적이자 방향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레인저 선생님과 닉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단은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또 변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해야 할 것과 변하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물러서면 안 되는 삶의 원칙에는 적당히 타협하고 살면서 개인 간의 사소한 취향 차이에 발끈하고 있지는 않나요? 공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아이들과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아이들의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이 “요즘 애들...” 운운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 모든 것들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혀를 차는 요즘 아이들의 언어 문제. 줄임말 자체는 나쁠 것도, 문제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반영할 뿐입니다. 다만 반영되는 일상이 부정적인 것들 투성이라면 그것을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숱한 은어와 줄임말들이 험악한 학교 생활을 반영하고 상처받는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어른들은 ‘단어’를 못 쓰게 금지할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만들어지는 환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들과 욕이 난무하는 아이들의 일상을 안쓰러워하고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 왔어. 그래서 나는 영원히 변함없는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써 왔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금방 낡은 것이 되고 말지. 하지만 언어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이란다.” (148쪽)
* 함께 읽은 책
<프린들 주세요> 앤드루 클레먼츠, 사계절,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