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 쩐' 중 2의 소리 없는 아우성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
이 한 문장을 품고 24시간, 365일 ‘한 사람’을 기다리는 곳이 있습니다. 몇 백 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어이없이 사라지고 잊혀가는 요즘에 말입니다.
2011년 한남대교와 마포대교부터 2014년 양화대교까지 모두 14개의 다리에 53개의 전화가 생겼습니다. 이 SOS 긴급전화에는 10개의 숫자 대신 빨간색과 초록색 단 두 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빨간색 119 버튼과 초록색 ‘생명의 전화’ 버튼입니다. 자살을 생각하고 강을 찾은 사람들에게 내미는 마지막 손길입니다.
긴급 전화가 놓이고 4년 동안 2,654건의 상담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10대 청소년들의 전화가 1146건으로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3~19세 청소년 100명 중 8명이 2014년 한 해 동안 최소한 한 번, 죽고 싶었답니다. 10대 청소년이 전 연령층에서 가장 자살충동을 느낀 비율이 높았습니다.
취업난 등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20세 이상 성인들보다도 10대들이 더 죽고 싶었던 이유는 성적과 진학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성적과 진학 문제로 가장 죽고 싶었고, 외모로 힘들어했으며 장래 직업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가정환경이나 경제적 문제, 그리고 친구와 이성교제도 그들의 큰 고민거리입니다.
13~18세 청소년이 고민이 있을 때 상담하는 사람은 어머니는 26.4%, 아버지는 4.6%에 그친다고 합니다. 즉, 부모 4명 중 1명만이 자녀가 현재 가장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알고 있고 나머지 3명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18%가 넘는 아이들, 즉 5명 중 한 명은 고민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힘드신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SOS 긴급전화에 적혀있는 문구입니다. 나쁜 마음을 품고 다리 위에 섰다가 수화기를 집어 든 사람들 중 10대 청소년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평소에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이 한강 다리까지는 안 올라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학생은 남산 인근에 살고 있는데 마포대교까지 와서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은 친구들로부터 다리에 전화가 있는데 24시간 언제든 전화하면 누군가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외로움과 절망감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았을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차들이 쌩쌩 달리는 소음 속에서 탁한 강물을 바라보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를 함부로 차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려령 작가가 우리에게 물어 봅니다. 힘들고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 시기를 건널 수 있는 건널목이 되어 주던 ‘건널목 아저씨’를 본 적이 있냐고요. 아빠가 죽고 깜깜한 세상에 덩그러니 단 둘이 남았던 태희와 태석이가 너무 무섭지 않도록,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옆에 있어준 건널목 아저씨. 아빠의 폭력을 피해 밤마다 아파트 계단과 놀이터를 헤매던 도희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던 아저씨. 그리고 태희와 태석이와 도희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만들어준 어른.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요.
건널목 아저씨는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남에게 베풀면서 치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금 같던 쌍둥이 아들들이 교통사고로 죽자 카펫으로 만든 횡단보도를 둘러메고 다니며 위험한 도로의 파수꾼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벼랑 끝에 몰린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 주었던 든든한 이웃이었습니다. 그런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또다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는 <완득이>와 <우아한 거짓말>의 김려령 작가가 2011년 발표한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어린이용 동화책으로 출간되었다가 어른용 양장본도 나온 인기 도서입니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읽기에 딱 좋은 책이지요. 두께가 얇아서 부담도 없고 따스하고 재미있는 줄거리가 한 자리에서 후딱 읽힙니다.
중 2 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이 ‘허세’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허세에는 ‘외로움’이 숨어 있습니다. 절대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허세 ‘쩐’ 행동을 합니다. ‘허세 쩐’ 중학교 아이들은 소리 내어 도움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섭고 외로워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들킬까 봐 겁을 냅니다. 침을 뱉으며 욕을 하는 아이들의 허세만 본다면 차라리 피하는 게 낫다 싶을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아직 15살밖에 안된 여린 아이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아이들은 왜 이 모양인지 몰라’라고 말하지 마세요. 어른들이 10년 전보다, 20년 전보다 살기 힘들어진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이들의 삶도 힘들어졌습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핸드폰과 애완동물, 중학생 아이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게임을 하고 웹툰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고 따스함을 나누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혹시 우리 아이들은 마음을 나눌 대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려령 작가의 말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크고 작은 개울이 많았습니다. 근사한 다리보다 돌덩이로 만든 징검다리가 더 많았던 곳입니다. 징검다리에서 장난을 치다 물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좋았습니다. 돌과 돌 사이가 멀어 머뭇거릴 때 손 내밀어 주는 친구가 있었잖아요.
자라면서 개울은 사라지고 도로가 생겼습니다. 나는 벌써 어른이 되어 건널목 앞에 서 있습니다. 조심하면 괜찮다고, 잘 살피고 건너면 된다고, 이제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어른이고 싶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을 테지요. 어른들도 부족한 게 많아 번쩍 안고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덜 힘들게 덜 아프게 덜 무섭게 그 시기를 건널 수 있도록 건널목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친구라도 좋고 이웃이라도 좋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도 괜찮고, 누군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작가 후기 중에서-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부모는 그 자체로 든든한 존재랍니다. 간혹 울타리 밖의 세상을 헤맬지라도 기다리는 부모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무조건 한 편이 되어줄 부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한 그런 존재임을 의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 아이와 또래의 친구들에게, 더 든든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세요.
<누가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에 등장하는 '듣기 교실'은 아이들보다 어른들, 특히 부모들에게 필요한 교실입니다. 판단부터 하지 마세요. 그저 잘 들어주세요. 온몸과 온 마음으로 아이 말을 들어주세요. 아이들의 퉁명스러운 말투 뒤에 숨어 있는 행간을 느껴주세요. 그리고 모든 대화의 끝을 "......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야 해."로 마무리하지 말아주세요.
'듣기'가 든든한 부모가 되는 첫 발자국이랍니다.
"보살펴 주는 누군가가 있어도 존재 자체로 든든한 부모와는 다르지.
밤 늦게 혼자 있으면 멀쩡한 집도 얼마나 무서워. 그런데 엄마 아빠가 띵동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 무서움이 싹 가시잖아. 부모는 그런 존재야.
사람들은 지하가 지상보다 더 시원하다는데, 그 집은 미치도록 더웠어. 여름에는 땀띠가 두드러기처럼 온몸에 돋았다니까. 그래도 태석이와 태희는 창문을 열지 못했어. 창문으로 보이는 발들이 너무 무서웠거든. 저벅저벅 걸음 소리, 끼익!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아빠가 돌아가신 것보다, 엄마가 떠난 것보다, 창밖에서 들리는 그런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어." (130쪽)
"아이들은 알고 있었지. 놀리고 놀려도 달려와 혼내 줄 부모가 없다는 걸.
태석이는 엄마를 기다렸어. 처음에는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언제부턴가는 나서서 싸워 줄 엄마를 기다린 거야. 어른이 따지러 오면 어른이 나가 주는 집,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지. 무조건 자식 편인 부모가 있는 집, 그런 집 말이야." (146쪽)
* 참고 :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려령, 문학동네, 2011
2014년 사회조사 (통계청)
생명의 전화. 홈페이지 http://www.lifelin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