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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트립 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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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Mar 14. 2020

트립 투 베를린 얼론-0


베를린에 다녀온 지가....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충격적이다. 헐.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게 충격적이고 베를린에 갔다 오고 나서 써 내려간 생각들이 산발적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다. 


그러고 보면 일기를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습관은 참, 만들긴 어려운데 없어지긴 쉽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어쩌면 없어지기 쉽다는 건 아직 완벽한 습관이 되지 않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7년을, 8년을 그렇게도 일기를 써대고 온갖 텍스트를 뽑아냈는데도 쓰지 않는 버릇은 너무 쉽게 나를 덮어버렸다. 훔. 그래서 베를린 갔다 온 것도 아예 못쓰고 있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가을, 알 수 없는 중압감이 일상에 휘몰아치기 시작하면서. 아껴두고 아껴두었던 여행지인 베를린을 가보고 싶단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다소 급하게 추석 연휴와 일정을 붙여 베를린 여행을 계획했던 게.


사실 뭐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보고 싶은 몇 개가 명백했어가지구. 


1. 일단 남들은 이제 모조품만 남았으니 절대 사지 말라고 하는 베를린 장벽을 한 조각 사 오고 싶었고. (첫날 만난 마리트 가이드님도 절대 사지 말랐는데 진짜 절대로 사옴)

2. 훔볼트 대학 본관 계단 촘촘히 적혀있다는 '계단주의' 문구, '철학자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하고자 했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는 마르크스 테제가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3. 아. 말할 것도 없이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 궁금했고.


무엇보다 이번 베를린 여행을 혼자 가게 되면서, 세상의 비관을 다 끌어안고 살던 20대 시절에 너무나 심취해있었던 사람들과 어휘들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20대 초중반 때 얼마나 독일 빠순이였냐면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한국 사람들 다음으로 독일 사람들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

(근데 20대라고 말하기 좀 쪽팔린 게 아직 30대 초반임)


어쨌든 내가 20대 초반에 '별 헤는 밤'에 나오는 것처럼, 마냥 그 자체로 심취해있던 어휘와 사람과 이름과 제목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음 뭐, 지금도 줄줄 읊을 수 있는, 막스 베버, 칼 마르크스, 게오르그 짐멜, 위르겐 하버마스, 테오도어 아도르노, 울리히 벡, 게르하르트 리히터, 파울 쿨레, 파트리크 쥐스킨트,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알리스 슈바르처, 베토벤, 슈만, 브람스, 헨델 이런 사람들 말이다. 지금도 독일 갬성이 가득 차 있는 책장을 보면 웃기다. 

아, 30대가 되어서는 리슬링 와인에도 눈을 떴다. 

오죽하면 스무 살 때 알게 된 내 친구 허기자님은 독어독문학과에 사회학을 복수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여전히 나에게 사상적 아이돌의 위치를 겸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살짝 깜빡하고 있었던 사회과학 서적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의 나는 사념과 상념에 빠지는 게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환장할 스무 살의 나를 왠지 베를린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오글거리는 느낌적인 느낌이 이상하게 들어서 베를린에 갑자기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서 베를린에 갔다. 일종의 덕후 투어를 간 거나 다름없다. 

혼자. 8박 9일간.


여전히 밤거리를 무서워하는 유흥 찐따라 그 힙하다는 베를린의 클럽과 바도 한번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리 터지게 박물관과 유적지를 돌아다녔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매일같이 리슬링 와인을 사다가 침대 위에서 퍼석한 크래커를 안주로 씹어먹으며 한 병씩 비웠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정신없이 현생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러 여러 장 구매해온 엽서(훔볼트 대학의 마르크스 테제가 적혀있음)는 집과 사무실에 붙어있고, 나는 언젠가 다시 그곳에서 꼭 살고 말리라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다. 좋은 인생의 목표가 생긴 거다. 


예전처럼 기운 넘치게 모든 여행을 시간순으로 정리할 자신은 없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베를린 여행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감상에 젖어 있었어서 오글거림 터지는 여행기가 될까 봐 좀 걱정되지만. 

일단은 1000장 정도 찍어두었던 아이폰에 있는 사진이랑 그때 중간중간 적어두었던 메모를 다시 덧붙여보기로 한다.


[방문했던 곳: 여행기 참고용]

- 셀렉트 호텔 겐트아르멘마르크트, 베를린 중앙역, 국회의사당, 브란덴부르크 문, 홀로코스트 추도비, 포츠담 광장, 체크포인트 찰리, 니콜라이 교회, 하케셔마당, 이스트사이드갤러리, 카이저 빌헬름 교회, 신/구 내셔널 갤러리, 구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박물관 섬, 노이에 바헤, Warschauer Straße(못읽음 헤헤), 베를린 돔, 문화의 양조장, 마우어파크, 아르코나 벼룩시장, 베를리너 안티크 마르크트, Boxhagner Platz, 홈볼트대학교, 더 서커스 호스텔, 하우스 슈바르첸베르크, 하케쉐르마켓, 하케셰호프, 베를린 국립 회화관, 크로이츠베르크, 크래프트워크 베를린, 베르크그륀 미술관, 쿠담 거리, 베를린 문화포럼 등등 되시겠다.



진짜 훔볼트 대학교 계단 모습이랑, 내방 책장에 꽂혀있는-내가 사온 엽서 모습.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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