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회사가 되면 벌어지는 일
2월 마지막 주.
회사에서 전원 재택근무 결정을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 19가 무섭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재택근무가 장기화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단지 어차피 결정할 거였다면 뉴스에 IT기업 중에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게 했으면 좋지 않았겠냐는 볼멘소리만 했다.
퇴근 시간, 파트 사람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괜찮아지면 회사에서 봬요.
그런데 이렇게 3주째 집에서 일을 하고 다음 주도 꼼짝없는 재택근무를 하게 될 줄이야.
하나, 그 날 퇴근하던 과거의 나에게 장하다고 칭찬하고 싶은 건 회사에서 모니터와 키보드, 트랙패드를 챙겨 온 것이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하루 최소 8시간 동안 작은 노트북 모니터를 보고 있는 건 끔찍했다.
새벽 장애처리를 할 때마다 작은 노트북 화면의 코드를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회사에서 봇짐을 한가득 가지고 와서 어디에 사무실을 꾸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화장대에 있던 나무의자도 가져다 놓았고 옆에는 아랑이 전용 전기담요도 깔았다.
재택근무 1일 차
행복하다.
원래도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눈을 뜨고 머리를 감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고 양치만 한 상태에서 어기적 어기적 의자에 앉으면 출근 끝. 이 얼마나 쾌적한 환경이란 말인가.
아랑이의 방해를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아랑이는 전기담요 위에서 조용히 잠을 자거나 내 모니터 화면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근무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옆에 아랑이를 끼고 앉아서 하는 업무라니. 아예 재택근무하는 회사로 옮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재택근무 3일 차 .
피곤하다.
목받침 없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서 일하려니 엉덩이도 허리도 목도 너무 아픈 느낌이다.
"의자의 생명은 아름다움이지"를 외치며 인체공학적이게 만들어진 피시방에서 쓰이는 듯한 의자를 거부했던 나 자신에게 살짝 화가 난다.
아침이면 파트 사람들과 커피타임을 하고 점심에는 외식 메뉴를 정하고 오후쯤 머리가 안 돌아가면 사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뽑아마셨는데. 이런 흐름이 하나도 없으니 쉬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중간에 개발 흐름을 방해하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일이 엄청 잘되긴 한다. 평소였으면 2일 정도 걸렸을 업무를 파워 집중모드로 일하니까 6시간 만에 끝내는 기적도 보여낸다. 사실 그렇게 집중해서 하려던 건 아닌데 아무도 안보고 있는 곳에서 일하니 일을 안하는 사람 취급받을까봐 놀고 있는 줄 알까봐 더 집중해버렸다. 재택형 인간인가.
재택근무 4일 차
화상회의를 진행했다. 우리 회사는 구글 행아웃으로 회의를 하는데 묘하게 오글거리면서 평소 회의하던 것처럼 농담을 껴서 진행하지 않으니 업무 이야기를 빠르게 하고 마무리하게 되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회의는 좋은데 얘기를 길게 해야 하는 토의가 필요한 내용은 불편한 감이 크다.
살짝 우스우면서 편한 점은 화상회의를 할 때 윗 옷은 멀쩡하게 입었지만 바지는 집에서만 입을 수 있는 후줄근한 츄리닝 바지를 입고 한다는 것이다. 화상은 어차피 흐릿하게 나오니 화장도 굳이 하지 않고 해도 된다.
편한 점 또 하나는 화상회의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건 다들 똑같은지 불필요한 회의가 줄어들었다.
재택근무 5일 차
원래 아랑이는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말을 쉬지 않고 하면서 졸졸 따라다닌다. 씻으러 들어가면 자지러지게 울어서 문을 열고 씻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으니 아랑이가 울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도 얌전하게 앞에 앉아서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서 외로웠다고 말하는 거였구나. 미안하고 재택이 끝나면 다시 이렇게 붙어있어 줄 수 없어서 생각이 많아진다. 외롭지 않은 고양이로 키우고 싶었는데.
재택근무 6일 차
나 하나 먹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뭘 먹을지 모르겠고 해 먹긴 귀찮아서 차를 끌고 나갔다. 생각을 안 하고 나왔더니 뭘 사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50분의 드라이브 끝에 파리바게트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묘하게 억울하다.
입맛도 없어져서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고 식사를 마무리했다.
회사에서 주는 밥이 이렇게 귀한 줄 몰랐다. 시켜먹자니 너무 비싸고 (물론 그럼에도 시켜먹는다.) 식당에서 먹자니 재택근무시키는 마당에 그래도 되나 싶고 해 먹자니 너무 힘들다.
식기세척기를 진지하게 알아봤다.
재택근무 8일 차
아랑이는 원래 창가를 좋아한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바람이 느껴지는 자리.
그런데 계속 주방 한가운데 앉아서 보내게 하려니 나도 신경이 쓰인다. 아니면 내 의자가 너무 불편해서 내 몸을 좀 더 편한 곳에 놓고 일을 하고 싶은 본능이 발휘하는지도 모르겠다.
화장대로 쓰던 책상을 거실로 끄집어냈다. 쏘파 앞에 두고 나는 쏘파에 앉아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소파와 책상 조합으로 쓰니 책상이 살짝 높은데 그런대로 쏘파가 말캉해서 편안하다.
거실에 있는 캣타워로 아랑이도 근무지를 이동했다.
재택근무 10일 차
책상과 소파의 높이 괴리감이 너무 커서 불편하다. 목과 어깨가 굳으면서 두통까지 같이 와서 일을 하면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묵묵하게 집에서 일하고 집안일하고 점심은 직접 차려먹고 퇴근하면 설거지도 해야 하고 끝나면 바로 또 요리하고. 또 장도 봐와야 하고 아랑이도 챙겨야 하니. 이상하게 회사로 출근할 때보다 더 바쁜 느낌이다. 회사에서 해주던 빨래, 구내식당의 밥. 사람들과의 커피 한 잔. 이런 게 생각난다.
이제 재택근무를 한 지 3주째다. 다음 주면 4주 차에 들어간다.
재택근무의 큰 장점은 아랑이와 함께 하루 종일 붙어있을 수 있고 우리 집의 낮시간에는 햇빛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볼 수 있다는 것. 출퇴근이 0.1초면 가능하다는 점 정도로 보인다.
단점을 꼽자면 윗 집 어린이들이 얼마나 활동적이고 지치지 않는지 평일에 윗집의 사교모임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는 것, 너무 묵묵히 일을 하면서 업무를 오래 하게 돼서 오히려 진이 빠진다는 것. 업무 의견을 화상으로만 나누다 보니 깊게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는 점. 삼시 세 끼를 나 자신한테 해먹이려니 너무 고통스럽다는 점, 의자와 책상이 회사만큼 편하지 않다는 점 정도다.
쓰고 보니 단점이 더 많아 보이지만 아랑이가 옆에 있는 상태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크긴 하다.
그래도 이제는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싶어 진다. 내 직장 동료들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를 가지던 게 은근히 또 하고 싶다. 무엇보다 모두가 마스크를 껴야만 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해야 할 정도의 코로나 19. 이 이상한 흐름이 어서 끝났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