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안녕 Jan 12. 2021

시골에 살 때 꼭 눈이 왔으면 했어

8년 만에 만들어보는 눈사람

집 뒤 감귤밭에 쌓인 눈

제주에 눈이 왔다. 무려 며칠에 걸쳐서 내린 폭설로 4일 동안은 집, 집 뒤 산책길 외에는 가보지 못했고 5일째가 돼서야 정군의 차를 얻어 타고 눈썰매를 타러 갈 수 있었던 폭설.


사실 이 집에 살 때 펑펑 내리는 눈을 꼭 보고 싶었다. 

집 뒤에 있는 감귤밭이 너무 예뻤기도 하고 사람도 차도 잘 다니지 않는 동네길을 걷고 싶어서도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언제 또 이런 외진 곳에 살면서 앞 뒤로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에서 자연을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이러려고 배달도 안 오는 곳에 이사 온 것이니.

작년에는 눈이 오지 않아서 전세 계약이 끝나기 전에 어쩌면 눈을 보지 못하고 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아쉬웠는데, 내 마음이 하늘에 들렸던 건지 폭설로 응답이 왔다.

눈 구경하는 아랑이

아침에 침실에서 보이는 뷰는 이렇게 아름다웠는데 폭설이 오던 기간 동안 저녁이면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으로 가득 찬 세상이 내 눈에 제일 먼저 보였으면 하는 기대감으로. 

눈이 잔뜩 쌓여서 나무마저도 하얗게 변한 날, 아침에 창문에 서서 아랑이랑 눈 구경을 실컷 했다. 

이 순간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이틀은 집에서 눈을 봤다면 이제는 집 뒤 골목을 걷고 싶어서 중무장을 하고 산책을 나섰다. 눈에는 눈이 들어오고 바람은 차갑고 손은 얼어붙고. 그런데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눈을 맞고 싶었다. 이런 함박눈을 맞으면서 아직 까맣게 변하지 않은 하얀 눈의 뽀득거림을 느끼고 싶었다. 얼어붙은 손으로 셔터를 연달아 눌렀는데 눈으로 담는 것만큼 아름답게 담기지 않아서 아쉬우면서도 그렇게 숨 가쁘게 좋았다.

동네 감귤밭에 쌓인 눈도 예쁘지만 동네 강아지, 길고양이가 남기고 간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도 재밌다. 어디를 이렇게 바쁘게 갔을까, 발시려웠을텐데 열심히도 걸었네. 


티베트 여우 같지만 눈 고양이

혼자 눈을 굴리면서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근 10년 만에 만들어보는 눈사람 같다. 손도 시리고 두 볼도 빨갛게 얼어붙었고 마스크 때문에 입에 숨도 찼지만 이게 뭐라고 이렇게 즐겁다. 때 묻지 않은 하얀 눈사람이 내 손에서 만들어지는 게 그렇게 신난다.

카카오 눈썰매장 개장!

근 5일 만에 정군과의 데이트로 밖에 나올 수 있었을 때는 회사 오름에 가서 눈썰매를 신나게 탔다. 제주에 와서 회사를 다니면서 항상 저기서 눈썰매 타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지 실제로 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말이면 가족단위의 직원들이 갈 테니 혼자 가기 민망해서 못 갔고, 평일에는 눈이 오면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봐 못 해 본 회사 눈썰매. 정군이 든든한 몸으로 길을 내주니 눈이 매끄러워져서 신나게 탈 수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눈썰매를 타본 게 20년 전쯤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시간.

심지어 경비직원분이 회사 외부 사람들은 출입도 금지시켜주는 덕분에 프라이빗 눈썰매장이 되었다. 

눈 세상 교래리

올해 눈의 끝자락은 토리와 함께 보냈는데 교래리에서 닭칼국수를 먹고 산책한 동네가 또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눈이 왔을 때는 골목을 다녀야 한다.


서울에 살던 때는 눈이 오면 너무 싫었다. 6시 40분이면 회사에 출근을 하러 나왔었는데 길에 질척거리면서 까만 국물처럼 녹아있는 눈이 신발에 묻는 게 너무 싫었다. 날이 추워서 바닥이 얼어붙어 있기라도 한 날에는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역까지 가는 길이 애매한 경사로라서 흔들거리면서 불안하게 걸어가는 것도 무서웠고 그때마다 출근이 늦어지는 것도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눈이 싫었던 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새하얗게 쌓인 눈을 보지 못해서 아닐까 싶다. 눈이 오면 사람도 차도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서울에서는 그런 곳 자체가 없으니 싫었던 건가 싶다. 


시골에 살아서 좋다. 사실 시골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위치긴 하지만, 눈이 많이 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사람도 차도 안다니는 산책로가 있어서 참 좋다. 차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골목이 있어서 새하얀 눈이 오래 가는 것도 좋다. 지금의 나는 눈이 참 좋다.




작가의 이전글 결국 엄마가 회사를 그만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