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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안녕 Jun 30. 2021

제주에 사는 뚜벅이,안 불편한가요?

제주에서 면허를 땄어도 제주는 걸어야죠

수능이 끝난 고3 수험생들은 대부분 대학에 가기 전에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한다. 내 주변에도 장롱면허일지라도 스무 살에 운전면허를 딴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주변에서 다들 면허를 따고 있는데도 나는 면허를 따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다. 내가 제주에 살게 될 거라곤 생각도 안 하기도 했고, 서울의 편리한 대중교통 시스템에 너무도 만족하고 있었고. 대중교통이 끊긴 시간은 보통 회삿돈으로 택시를 타거나 친구들과 술을 함께 마시고 가는 길이니 같이 N빵 택시를 탔다. 


그렇게 운전면허 자격증 하나 없이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에 내려가면서, 그리고 내려와서도 내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면허증의 유무를 물었다. 면허가 없다는 말에 불편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했고 운전을 해 본 적 없는 나는 딱히 불편함이 없다고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에 내려와 내가 처음 자리 잡은 동네는 이도동이었는데, 치안이 잘 되어있었고 은행, 병원, 마트 모든 게 다 근처에 있어서 차를 몰고 멀리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제주에 내려와 한 1년 정도는 내가 사는 이도동에서만 주야장천 놀았는데 그건 이도동이 내가 서울에서 살던 동네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 같다. 서울에서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천장 끝까지 꺾어야 했는데 주택이 많이 있는 이도동에서는 어디를 걸어가든 하늘이 잘 보였다. 


내가 사는 주택에서도 저녁이면 거실 큰 창으로 발갛게 익어가는 하늘이 항상 보였는데, 퇴근길이면 동네 카페에서 케이크를 사서 거실 창 앞에 앉았다. 케이크 한 점에 하늘 한 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내 행복이었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이 동네에는 카페도 상점도 많아서 골목 구경을 다니다 보면 구경하는 즐거움이 쏠쏠했기도 했다. 걷다 보면 나타나는 빈티지 가게도 그랬고 어쩌다 찾은 조그만 옷가게는 전부 내 취향에 그득했고. 케이크는 맛없지만 꾸민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드는 카페도 있었고.  

주변에서는 동네에서만 시간을 보내면 지루하지 않냐고 묻곤 했는데 나는 이도동만 다녀도 1년은 놀 수 있다고 말하곤 했고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이도동의 좋아했던 카페. 온실에 들어와있는 느낌이라 아주 사랑했는데 지금은 이 공간이 없어졌다.


그다음에 살게 된 아라동. 

여기는 이도동만큼 아기자기하지 않았고 조금은 오르막길이 많았고 길도 어두운 편이었는데 이 때도 조금의 불편함이 있다 뿐이지 힘들지 않았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지 않으니 늦은 밤에 들어올 일이 없었고 내가 다니는 동네 산책은 항상 한정적이라 오르막길은 늘 예측이 되었으니. 물론 이제 동네에 볼 게 없으니 슬슬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느낀 제주와 서울 버스의 차이점은 제주가 버스 배차 간격이 더 길었고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갈수록 버스 배차 간격이 아주 길었고, 공항에서는 동일한 버스번호를 가졌지만 정반대로 가는 버스가 존재했다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제주 풍경은 내 눈엔 전부 신기하고 여행 같아서 힘들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 동안 버스를 기다려도 주변의 소리, 풍경, 냄새까지도 구경거리로 보여서 지루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고양이와 하늘로 눈을 뜨는데 하루도 같은 모습은 없었다.

문제는  내가 취미생활을 시작하고부터였는데, 회사 사람들 권유로 제주대 평생교육원에서 하는 배드민턴 수업을 신청했고 배드민턴에 푹 빠지면서 차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배드민턴 수업을 가고 싶은데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거나, 나는 배드민턴을 더 치다가 집에 가고 싶은데 차를 태워주는 회사 동료가 집에 가야 한다거나. 어쩌다 야근을 하고 늦게라도 배드민턴을 치러 가고 싶은데 택시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면 이미 끝나 있을 시간이라던가. 활동이 생기니 불편해졌다. 

배드민턴으로 나는 일주일 사이에 면허를 따고 어머니 차를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왔다.


운전을 시작한 후의 제주에서의 삶과 하기 전의 삶을 비교하라면 물론 운전을 할 때가 훨씬 윤택하다. 가고 싶은 빵집이 멀어도 쉽게 갈 수 있고 자동차 안에 짐을 잔뜩 싣고 다녀도 어깨가 빠질 것 같지 않고 저녁에 노을이 보고 싶으면 퇴근하고 바로 차를 타고 달려가면 된다. 


그런데 운전을 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잘 알고 싶다면 걸어 다녀야 보인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놀라울 정도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골목을 걸어 다니면 잘 보인다. 동네 사람들이 다듬어 놓은 화단, 작은 골목에서 발견하는 동백꽃길, 차는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길에서 보이는 빛나는 바다. 아기자기한 돌담이 이쪽저쪽 신기하게 모양이 다르게 쌓아져 있는 것까지도. 

천천히 걸으면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운전을 시작하고서도 나는 여전히 올레길을 걷는 걸 즐긴다. 예전처럼 사는 동네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는 것도 즐긴다. 걷다가 발견한 아이스크림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마시면서 창 밖 구경하는 걸 좋아하고 걷다가 발견한 떡볶이집을 기억해뒀다가 남편과 함께 먹는 걸 좋아한다. 


제주를 잘 알고 싶으면, 아니 제주가 아니라 어디서든 그곳을 느끼고 싶으면 걸어야 보인다. 

차를 타고는 절대 갈 수 없는 길
걸어서만 볼 수 있는 제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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