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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미상 Dec 10. 2019

개인면담을 부른 시

마지막 시화전



교복을 입던 학창 시절부터 나는 시를 좋아했다. 자의와 타의로 크고 작은 백일장에 참여해 상을 타곤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욕심내던 대회는 시와 그림이 한 폭에 어우러져 걸리는 교내 작은 시화전이었다. 인상적인 그림과 길지 않은 문장의 나열로 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파고드는 시화는 내게 떨치기 힘들 만큼 매혹적인 예술과 서정적인 문학이 낳은 특별한 부문으로 느껴졌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정이 훗날 나를 카피라이터로 길러낸 근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 깊을 그 시기에, 부모님의 불화는 극에 달해 있었고 그로 인한 나의 어두운 면은 여과 없이 활자로 풀려나갔다. 그 해 시화전의 주제는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잘 어울리는 '날개'였다. 그에 맞게 모두가 밝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시화를 제출했으니, 그 사이에서 홀로 검푸른 흑염룡이라도 뱉어 낼 듯한 나의 시화가 선생님의 눈에 걸리지 않을 리 만무했다. 선생님은 나를 따로 조용히 부르셨다. 학교생활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고 처음 겪어보는 내밀한 면담이었다.


요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우울한 내색이 역력한 내 시에서 겉으로는 완벽하게 모범적인 학생의 불안한 파동을 감지하셨고, 걱정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질문과 말씀을 건네셨던 것 같다. 다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더 살아보면 좋은 일이 많다'는 식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의 말씀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건, 처음으로 시에 대해 낱낱이 평가받는 현장에서 눈구멍과 목구멍으로 치밀고 올라오는 것들을 힘들게 삼켜내느라였다. 외로운 십 대에게 그 자리는, 어렵게 아픈 손가락을 내밀었는데 여기는 이래서 밉고, 저기는 저래서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불안한 건 집 하나면 족했기에, 학교에서의 안정감마저 잃어버릴 순 없다는 방어기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선생님의 염려를 몇 번의 적절한 끄덕거림과 함께 끝까지 잠자코 들었고, 학생을 생각하는 좋은 스승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야생 덩굴 같은 시구절 몇 군데를 고쳐서 다시 제출했다. 그 시화전에서 나는 최고상을 탔다. 하지만 그 덩굴을 다듬으며 떨어진 가시들은 거꾸로 내 속 어딘가에 빠지지 않게 박혀 버렸고, 그 뒤로 나는 시화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안다. 중년의 선생님도 예민한 미성년의 아이가 겪는 고통과 위태로움을 달래는 방법이 익숙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는 서툴렀고 어딘가는 도리어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그 의중만은 분명 따뜻했다는 걸 교복 끝을 말아쥔 채 듣고 있던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날, 마음 어딘가는 아팠지만 또 어딘가는 분명 위안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 언저리의 나는 뱉어낼 곳 없는 속마음을 글자에 담아 날려 보내듯이 시를 썼다. 날개 달린 그 언어들이 어여쁜 파랑새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떤 새는 꺾어졌고, 어떤 새는 눈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시기에 충분히 검은 새들을 가슴에서 날려 보냈고, 흰 종이에 박힌 까만 새들은 인상적인 엽서처럼 혹은 아프지만 의미 있는 한 폭의 시화처럼 남았다. 그 자체로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큰 상을 주었다고 믿는다.


지금 나의 새들은 무작정 가슴을 떠나 도망치듯 날아가지 않는다. 꽃가지를 물기도 하고 작은 열매를 물기도 한다. 여전히 작은 새라서 무겁고 커다란 것은 물지 못하더라도, 작아도 의미 있는 것이라면 물어다 주고 싶어 하는 새들이 많다. 어린 날의 까만 새들이 이렇게 몰라보게 털갈이를 했다. 여전히 완벽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지만 저마다의 고운 색을 지닌 이 새들이, 예쁘다는 마음보다 앞서 짠하고 대견한 이유다.


새는 그저 날기 위해 알을 깨는 법. 하늘도 끝이 없으니, 사는 동안 끝 모르고 날 듯이 편하고 자유롭게 써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어느 날은 부족하고 어느 날은 만족하며 늘 그래 왔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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