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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g Ha Jan 05. 2021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가네시로 가즈키 《GO》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렇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짧고 뭉툭한 파이프를 표현한 르네 마그리트의 1929년 작 <이미지의 배반>은 파이프 ‘그림’인 것이지 실재하는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파이프를 그린 것이 아니다. ‘파이프’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무언가를 그린 것이다.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다분히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파이프이기도, 파이프가 아니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표가 가리키는 ‘기의’, 파이프라고 불리는 ‘무언가’, 그리고 조선인이 될 수도, 한국인이 될 수도 있는 ‘스기하라’ 그 자체이다. 기표나 이름 따위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본의 아니게 조선 국적을 갖고 있는 ‘외국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기의가 아닌 기표에 정신을 팔리곤 한다. 이름이 주는 편견에 갇혀 본질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눈앞의 대상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이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GO》의 주인공 스기하라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고 일본 말을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리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조선인의 국적을 지닌 ‘외국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스기하라는 ‘재일 조선인 1’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 구석구석에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어떻게든 일본인으로부터 구분 짓고 차별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일본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스기하라에게 싸움을 걸고, 그래서 스기하라는 ‘본의 아니게’ 그리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무패의 사나이’가 되고 만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님을 따라 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꾸고 일본인 학교에 입학한 스기하라는 이전의 조선학교 친구들과 선생들로부터도 배척당한다. 조선인 선생에게 따귀를 맞으며 스기하라는 생각했다. 매국노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교실 뒤쪽에 앉아있던 정일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우리들은 나라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어떻게 팔 수 있고, 무엇을 배신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스기하라라는 기의, 즉 본질이 아닌 재일 조선인/한국인이라는 기표만으로 스기하라를 판단하고 욕하며 차별한다. 스기하라는 반문한다. 국적 같은 것은 아파트 임대 계약서 같은 것이라고, 이름 따위가 아무려면 어떠냐고, 최초의 여성으로부터 전해진 미토콘드리아 DNA를 모두가 갖고 있다면 도대체 그놈의 민족이라는 것, 뿌리라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이냐고.     


“네 녀석은 어느 나라 국적을 사고 싶으냐?”     


아르헨티나 출신의 라틴아메리카 학자 월터 D. 미뇰로는 ‘인종주의란 인간을 분류하는 기준을 정하고, 그러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분류하는 헤게모니 담론’ 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타자화는, 우열 가리기를 통해 타자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18세기 유럽의 식민주의 논리이다. 또 이러한 논리를 누구보다 빠르게 내면화한 20세기 일본의 제국주의 논리이기도 하다.


즉 작품 속에서 스기하라가 겪는 차별과 폭력의 근거인 국적이나 민족, 그리고 인종이란, 비유럽세계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식민주의의 논리가 국가가 아닌 개인들에게도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21세기에도 스기하라와 같이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스기하라만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스기하라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쿠라이도, 미국인이라면 흑인도 인디언도 아프리칸 아메리칸,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며 추켜세우지만 정작 자기 조국인 일본을 싫어하는 사쿠라이의 아버지도, 차별과 폭력의 피해자였으면서도 사쿠라이에게는 서슴없이 가해자가 되었던 조선학교 학생과 선생들 역시 이러한 식민성의 논리를 내면화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식민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이분법과 타자화에 기반을 둔 식민성의 논리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착취의 논리가, 이렇듯 우리 안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으며, 때로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해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이를 눈치챈 스기하라는 사쿠라이에게, 일본에 되묻는다. “너희들, 내가 무섭지? 어떻게든 분류를 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지?”     

     

“언젠가는 반드시 국경을 없애버리겠어.”     


사쿠라이를 만나며 스기하라가 처음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이다. 그 어떤 차별과 폭력에도 도망가지 않았던 스기하라는 이제 차별이 두렵다. 싸움이 일상이었던 ‘25전 무패의 사나이’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며, 단순한 의문에 불과했던 국적과 민족에 대한 스기하라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그저 몸으로 부딪혀 싸우기만 했던 스기하라는, 정일의 죽음, 사쿠라이와의 이별, 아버지의 눈물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마주하고 보다 근본적인 답을 찾고자 한다.


스기하라의 답은 국경을 지우는 것이다. 일본에 맞서는 재일 젊은이들의 모임에 참여하라는 미야모토에게, 그는 ‘이제 더 이상 국가 같은 것에 새롭게 편입되거나 농락당하거나 구속당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언뜻 보면 그저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국적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다짐, 국경을 지워버리겠다는 포부는 사쿠라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성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착취를 정당화하는 타자화, 타자화의 근간이 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반복되는 차별과 폭력의 고리를 끊겠다는 결심이다. 추상적이고 막연하지만, 예리하고 정확하다.


물론 이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스기하라 외에도 다른 인물들 역시 차별적 현실에 대응하는 각자의 답을 찾았거나 찾고 있는듯하다.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강한 태풍이 올수록 유연한 풀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정일은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의 힘을 강조했으며, 재일 조선인으로 남겠다는 원수는 어중간한 인간이 아니기 위해 계속 뛸 것이라고 다짐한다.


사쿠라이의 변화 역시 눈에 띈다. 일본인인 사쿠라이는 그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스기하라를 만난 뒤, 정확히는 스기하라의 ‘한국인 고백’을 들은 뒤, 본인 안에 있던 가치관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한국인과 스기하라라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무엇이 이름이고, 무엇이 본질인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헤매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처음 스기하라를 보았을 때의 감정, 그 흥분과 감동이 진짜임을 깨닫고는 스기하라에게 고백한다. “이제 스기하라가 어떤 나라 사람이든 상관 안 해. 때로 내게 날아와서 나를 쏘아봐주면, 일본 말을 할 줄 몰라도 상관없어. 스기하라처럼 날기도 하고 쏘아볼 수도 있는 사람, 아무데도 없는걸 뭐.” 장미의 향기, 브람스 음악의 아름다움, 스기하라의 눈빛은, 국적이나 이름 따위와는 상관없는 것임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요 소이 데사라이가도”


자의적으로, 때로는 타의적으로 우리를 규정하는 수많은 이름 속에서 진짜 나는 누구일까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소설 속에서 스기하라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성장하는 여정과 일맥상통한다. 무엇보다, 권투를 정말 배우고 싶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원 밖으로 나가겠다는 스기하라의 대답과 태도는 역시나 같은 과정에 있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응원이 될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요 소이 데사라이가도(Yo soy desarraigado, 나는 일개 부초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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