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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g Ha Feb 03. 2021

생활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일의 기쁨과 슬픔》




“사실 회사에서 울어본 적이 있다. 거북이알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내 표정을 보지 못하게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눈 밑에 휴지를 갖다 댔다. 시뻘게진 눈에 한참을 손 부채질하고 난 뒤에야,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심장이 계속 벌렁거리는 것이 욕설 가득한 어느 고객의 이메일 때문인지, 빈속에 들이부은 출근길의 아메리카노 탓인지,  헷갈렸다.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자를 몇 차례 받고 나서야 겨우 시작한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몇 번을 확인하고도 퇴짜 맞기 일쑤였던 보고서 양식도 금방 적응했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업무상 전화나 메일도 막상 일이 많을 때는 거침이 없었다. 직장은 학교와는 다르다며, 다들 가식이고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던 친구의 경고와는 달리 마음 맞는 동료도 한 명 생겼다.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상사나 게으른 동료직원 때문에 불필요한 야근을 하기도 했고 우리 집 숟가락 개수까지도 알고 싶어 하는 오지랖 넓은 사수 때문에 피곤한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역시나, 생각보다 괜찮았다.     


문제는 퇴근 후에 있었다.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도록 맡은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종일 긴장하고 있다 보면,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퇴근길에는 녹초가 되었다. 취업만 하면 이케아에서 북유럽 감성의 책장을 사야지. 그동안 돈이 없어서, 그래서 그 돈을 버느라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 책들을 사다가 책장을 꽉 채워놔야지. 퇴근한 뒤 수입맥주 한 캔과 적어도 일주일에 한 권은 읽어야지.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반년이 지날 때까지도, 미처 다 조립하지 못한 책장 비슷한 것들만 방 한구석에 쌓여있었다. 이상하게도 일하느라 힘든 건 몸인데, 제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마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공감해 줄 여유가 없어서 단편 소설 하나 읽어내는 일조차 너무나 버거웠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가 겨우 나 하나만을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다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괜찮은’ 이 직장이, 나를 귀찮게 하지만 인생의 원수라도 되는 마냥 대놓고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사람들과의 사회생활이, 너무 사소해서 정성껏 화를 낼 수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고민과 정말 딱 일을 그만두지 못할 만큼의 월급이 너무나도 견딜만해서, 몸을 축내고 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이 악순환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 놓고 어디다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퇴사해야지’라는 말은 웃으면서 할 수는 있어도 울면서는 절대 할 수 없었고, 화가 아니라 눈물이 날 때는 그 누구에게도 응석을 부릴 수가 없었다. 슬픔을 나누면,


배가 될 것만 같았다.      


“겨드랑이가 젖어 있다고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이 놀랄 만큼 쉽게 읽혔던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한여름 출근길의 4,5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고 젖은 겨드랑이 같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곧 나의 일상이었고, 나의 이 쪼그라든 마음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크기였다.      


<잘 살겠습니다>의 빛나 언니나 <도움의 손길>의 도우미 아주머니처럼 얄미운, 그러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없는 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일상. 한여름 택시에 등을 기대 빨아올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의 기쁨과(<백한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힘들게 버텨온 지난 시간들이 스펙 몇 줄로 요약돼버릴 때의 슬픔(<탐페레 공항>).      


뚜렷한 위기나 절정도 없고 예상치 못한 반전도 없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며 나는 깨달았다. 아,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는구나.     

 

“Do not bend (Photo inside) 구부리지 마시오 (사진이 들어있음)”     


기쁨과 슬픔만이 아니다. 작가는 이 모든 일의 기쁨과 슬픔을 견디기 힘든 이유가, 하나의 완전한 앨범을 꿈 꾸지만 디지털 싱글에 지나지 않는, 냉장고 하나도 제대로 품을 수 없는 반지하 같고, 그마저도 <다소 낮음>이라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야 할 일이 우리의 일상 전체를 잡아먹어 버렸다. 내가 꿈꿨던 것은 ‘삶’이라는 무언가 거창하고 진지하고 낭만적인 것인데, 실상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먹고 싸고 자는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괴리. 그리고 이 생활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는 두려움과 막연함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는 것이다.     


<탐페레 공항>에서 주인공이 노인의 편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큐멘터리 피디를 꿈꿨던 때의 그녀를 담고 있는 사진과 편지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힘겹게 ‘생활’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에게 자꾸만 ‘삶’을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그때의 삶과 지금 생활의 괴리를 더욱 부각한다. 언젠가는 이 지지부진한 생활을 끝내고 탐페레 공항에서 꿈꿨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엽서는 오히려 그녀의 신경을 긁어대고, 결국 창틀에 붙어있던 노인의 엽서가 서랍 속으로 들어간 뒤에야 주인공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미련은 눈앞에 안 보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신입 피디 공개채용의 자기소개서 문항을 읽다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노트북을 휙 꺼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려 2차대전에 참전했다던 노인이 아직 그곳에 살아 있다는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주인공이 미루고 미뤘던 답장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마치 삶은 아직 여기 있다고, 늦어도 괜찮으니 언제든 다시 책을 펴고 펜을 들라는 위로 같았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이 적었을 “Do not bend”는, 마치 일의 기쁨과 슬픔에 지쳐 쪼그라든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나도 주인공처럼,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해보면 작가는 이 책의 첫 소설에서부터 우리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장류진 작가가 몇 번의 인터뷰에서 자조한 것과 달리, 사실 가벼운 건 그녀의 소설이 아니라 그 소설들이 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었다. 참을 수 없는 생활의 가벼움과 그로인한 기쁨과 슬픔. 장류진의 소설들은 ‘삶’이 되지 못한 우리 ‘생활’의 기쁨과 슬픔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품어내며, 파티션이 쳐진 사무실과 출근길 커피숍 혹은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위로를 보내온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작가는 그녀와 닮아있지만 그보다 씩씩하고 그보다 멀리 가는 이야기를 쓰며 “이제 더는 나 자신을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가진 ‘일의 기쁨과 슬픔’을 위로해 온 듯하다. 그리고 그 벅찬 경험을 이렇게 따뜻한 방식으로 나에게도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 역시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동안은, 나의 ‘생활’이 조금은 ‘삶’에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빛나 언니도, 나도, 장류진 작가도,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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