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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g Ha Dec 09. 2021

'노오력과 열쩡'의 성공신화 혹은 작은 밀레니얼 이야기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취업 준비는 기약도 없이 길어지고만 있었다. 시험 준비를 위해 부모님 댁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나는 일부러 부모님이 안 계신 시간에만 집에 들르곤 했다. 완연한 봄. 베란다 창문으로는 포근한 바람이 들어왔고 고시원 침대보다 너른 거실 소파는 참으로 폭신했다.

    

불안은 꼭 그런 때를 비집고 들어왔다. 상환은 시작도 못한 채 이자만 쌓여가는 학자금과, 그 학자금을 미처 다 갚기도 전에 찾아올 부모님의 노후와, 그리고 또 그리고.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차라리 사방이 어두운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는 때가 마음이, 편했다.      


“당시에는 하기 싫다고 말하기보다 실패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은 선택으로 느껴졌다. (애나 위너, <언캐니 벨리>)”     


물론 그래봐야 “우리는 대공황이래 처음으로 다수가 부모보다 못살게 되는 세대”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요즘 애들》에서 앤 헬렌 피터슨이 묘사하듯, 나 역시 밀레니얼 세대로서 ‘노오력과 열쩡’의 신화(혹은 민담이나 설화)를 듣고 자랐으며 그 신화가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밀레니얼들은 경쟁으로 가득한 청소년기와 대학 졸업장에 달려오는 학자금을 등에 지고 길고 어두운 취준생 시기를 지나 가‘족’같은 회사에 입성하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노오력과 열쩡’의 신화란 신기루와도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밀레니얼들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노오력과 열쩡’의 신화를 계속 써내려가고 있다. 이 모든 시궁창 같은 현실이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더 좋은 직장을 찾지 못했고, 더 높은 지위를 점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실로 우리의 ‘노오력과 열쩡’이 부족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은 학위와 자격증을 지닌!) 우리가 바보는 아니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보다 큰 구조적 문제이고 무너져가는 체제에서 기인한 것임을,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야 모를 수가 없지 않겠는가. 다만, 시궁창의 한 가운데서 허우적대는 순간들에는 그저 나를 탓하는 것이 언제나 쉽고, 빨랐다. 작고 소중한 근로소득과 거대한 부동산 시장 사이에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더 열렬히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저자가 책에서 인용하는 “생산성의 복음”이야말로 21세기 밀레니얼들의 신흥종교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그런 게 욕심일까? 잘 때는 음식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을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장류진, <달까지 가자>)”     


그러나 가끔씩은 나 역시 믿음이 흔들리곤 했다. 우리가 들인 인풋에 비해 손에 쥐어지는 아웃풋은 너무나도 형편없었다. 혹은 최선을 다하여 차악의 생활을 겨우 유지하는 느낌. 예적금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핀잔을 들으면서도, 주식과 코인은 노동의 가치를 모르고 불로소득만 좇는 짓이라고 욕을 먹었다. 또 종종 "요즘 애들"은 직업윤리가 부족하고 프로답지 못하다는 비판 혹은 비난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했던 것이 고작 원룸에서 투룸으로, “잘 때는 음식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 욕심이라고도 꿈이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그것을 ‘희망’해야하는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더 프로가 되어야 하는가.     


"관건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 어차피, 지구도 명망한다.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현재 밀레니얼은 '노오력과 열쩡' 신화의 잿더미, 그리고 세상 이기적이며 프로답지 못하다는 세간의 몰이해 속에서 한 세대나 하나의 국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깊은 번아웃에 빠져있다. 선배 밀레니얼인 앤 헬렌 피터슨은 베이비부머의 번아웃으로부터 이러한 밀레니얼 번아웃의 기원을 찾으며 오늘날 교묘하게 악화된 노동환경과 피폐해진 일상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 일등 공신은 당연 인터넷이다. 스마트폰 속 수많은 어플들이 우리가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속삭이며 말도 안되는 목표를 설정하게하고 우리 스스로를 갈아 넣도록 부추긴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 세계는 우리의 여가까지도 잠식해버렸다. 인스타그램 속 밀레니얼은 스스로가 번아웃되지 않았다고 증명하고자 동분서주하며 다시 한 번 번아웃되고 있다. 실상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이러한 자기 정당화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사진 찍힌 삶과 목표한 삶" 어드메에서 표류하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 인터넷은 아니다. 그 뒤에는 더 거대하고 복잡한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쥔 채 자기 혐오와 함께 잠에 든다.    

 

“자꾸 쓰고 말해서 우리가 우리를 수치스러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거라고, 결국 내가 문제고 내가 잘못됐고 나만 사라지면 된다고 결론짓는 일을 끝내고 싶은 거라고. (김병운,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앤 헬렌 피터슨이 《요즘 애들》에서 주문처럼 되새기는 말이 있다. “우리의 삶이 반드시 이럴 필요는 없다.” 그렇게 기나긴 번아웃의 끝에서, ‘노오력과 열쩡’의 신화 혹은 “생산성의 복음”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섹스와 결혼과 육아를 혐오하지 않는다. 솔직히 때로는 그것들을 너무나도 갈망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해내기에 우리는 너무 지쳤다. 그리고 이러한 밀레니얼의 번아웃은 절대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으며 분명 사회 전체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형용하기 어려우리만치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이 우리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고독한 개인을 양산하며 타인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이제는 우리의 언어로 그 구조적 문제를 낱낱이 파헤치고, 이 케케묵은 잿더미와 몰이해 속에서 존재 그 자체로 의미있는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구해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이고 “우리의 스케줄이 곧 우리의 삶”이라면, 우리가 읽고 쓰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은 우리가 아닐까.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읽고 써내는 것, 이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엿보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저항과 변화의 불씨를 지피는 것. 저자의 경고대로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잃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누구든 작은 밀레니얼을 건드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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