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렘으로 가득했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직접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매주 다양한 네트워킹 행사와 밋업(Meetup, 모임)에 참여했다. 매주 집 근처(Bay Area)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를 검색하고 예약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였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밋업이 열리기 때문에 위치, 참가비용, 그리고 행사 내용을 고려하여 우선순위를 정해 선택하곤 했다.
어느 날, 집 근처에서 열린 홍콩 투자청 주최 네트워킹 행사를 찾았다. 오후 5시쯤 시작된 행사에 한국인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친절한 주최 측이 무료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여 기분 좋게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곳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와 역사를 풍부하게 알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매우 즐거웠고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원어민이며 테크 전문가였다. ‘정말 대단한 걸 배웠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며 혼잣말로 되뇌었다.
‘MBA 갈 필요가 있나? 이렇게 실리콘밸리에서 매주 네트워킹 행사에 참석해 생생한 경험과 인사이트를 얻는 게 내가 원하던 최고의 공부 아닌가?’
몇 주 뒤 한국 정부가 주관한 K-startup 발표 행사에 참석했다. 혹시나 했던 나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실리콘밸리의 캐주얼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 코드와 높으신? 양반의 세상 지루한 콩글리쉬 인사말은 이곳 축제 분위기를 어색하고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본 행사가 끝난 뒤의 네트워킹 시간에 나는 열심히 명함을 돌리며, 외국인들과 더 많이 대화하려 노력했다. 그중 한 젊은 백인 친구가 구글 출신이라며, 현재는 한국과 중국 기업들의 지적 재산권(IP)에 관심이 많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우리는 그날 행사가 재미없었다는 공통의 화제로 급속히 친해졌다.
그런데, 그 친구 명함을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디자인과 이름이었다.
“어, 지난번에 이런 비슷한 명함 본 적 있는데?”라고 했더니,
“그거 우리 아빠야”
“농담하지 마?”
“아니야, 진짜로 우리 아빠일 거야”
진짜 그 친구의 아버지였다. 부자(父子) 지간에 명함을 같은 디자인으로 했던 것이다. 수많은 명함들 중에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Andy Pluemer와 Adam Pluemer의 명함 디자인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를 이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종사하는 2대째 엔젤 투자자인 것이다.
이후에도 실리콘밸리에서 다양한 부자 관계의 투자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Tim Draper였다. 그는 이미 한국 TV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Rock Star) 투자자였다. 500 Startups Demo day에서 할로윈 복장을 한 그를 직접 봤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들 중 한 사람인 그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복장을 하고 스타트업 행사에 나온 것이었다. 일흔이 넘은 부자 노신사가 스타트업 창업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 깊었다. 얼마 전 어색하다고 생각한 엄근진 한 정부 관계자의 외모와 너무 대비되었다.
몇 달 뒤 다른 Fintech 행사장에서 Tim과 비슷한 젊은 친구가 투자자로 앉아 있는 걸 봤다. 젊은 놈이 어떻게 투자자가 되었나 하고 그 이름을 보니 Draper라는 성이 눈에 띄었고, 얼굴은 누가 봐도 Tim Draper 아들인 걸 알 수 있었다.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투자자 였던 것이었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은 Draper 가문이 3대를 이어 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인 Henry Draper 역시 유명한 투자자였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실리콘밸리의 창업 생태계가 최소 50년 이상 지속되다 보니, 이렇게 대를 이어 생태계에서 일하는 사례도 많은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보며, 나도 아들과 함께 BaronGlobal을 운영하며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함께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세대는 다르지만, 스타트업 정신을 공유하고 혁신을 이끌어가는 그런 부자지간을 꿈꿔본다.
대를 이어 스타트업계에서 일하는 것 외에도 실리콘밸리의 테크 생태계가 주는 영감과 교훈은 많았다. 70~80대 은퇴자들이 엔젤투자자 클럽에 모여 혁신 사업 아이템과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고 투자를 논의하는 것을 보면서 이곳은 정년이 없구나 깨닫기도 했다. 한 전문 분야 경력이 최소 30년~40년 내공을 쌓은 머리가 희끗한 분들의 질문은 동네 밋업의 수준을 끝없이 높여 주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창업을 했던 결정적 이유도 이곳은 정년이 없고, 분명 한국 생태계도 실리콘밸리를 따라 계속 발전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