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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won Apr 01. 2017

'핵토'의 자의식

1. 핵토와 다리병신  

 내가 처음으로 ‘못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따돌림을 당했다. 같은 반 남자아이들에게서였다...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욕설이 적힌 책상에서 욕설이 적힌 교과서로 공부를 해야 했다. 서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부딪힌 부분을 유난스레 털어내는 그 아이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 ‘옷 빨아야겠다. 아님 버릴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낄낄거림은 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핵토’였다. 가장 듣기 싫었지만 가장 많이 들어야 했고 마치 내 이름처럼 불려야 했던 그 단어... “야 핵토! 저거 또 씹는다. 저 핵토는 공부라도 잘해서 다행이지 않냐? 저 얼굴에 공부까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냥 뒤져야지."...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도 친구는 짐짓 태연한 척 행동했고, 나 역시 그랬다. 아예 못 들은 척, 들리지 않는 척 교실로 들어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 시절 우리는 화장실도, 사물함도 함께 가는 사이였지만 친구는 왜 내게 혼자 가냐며 묻지 않았다. 그날 나는 울었다. ...나는 열다섯 이후로 지금껏 모래성이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우수수 무너져버리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힘든 것 같다. 갈수록 더 작은 땅의 진동에도, 더 가벼운 손짓에도 스러져 내린다. 더 이상 누군가 나를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버티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 어디까지 놓아야 하는 걸까. 어디까지 나를 미워하고 괴롭혀야 하는 걸까. (페이스북 페이지, '연세대학교 대나무숲')


 ‘핵토’라는 말은 극도로 혐오스럽다(구토가 난다)는 뜻의 은어다. 한 인간이 극단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는 때는 어떤 경우일까. 위 인용문의 글쓴이는 단지 ‘못생긴 얼굴’ 때문에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고교시절에도 한 여학생을 우리 반 아이들 다수가 ‘방사능’이라고 놀렸다. 이동 수업이 있을 때면 다른 반에서 건너온 아이는 그 아이가 앉았던 의자를 치우고 다른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그 아이가 어떤 계기로 ‘방사능’으로 불렸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순간 주변을 ‘오염시키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장애가 있었고, 방사능이라고 놀림받는 아이보다 외모가 나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놀림이나 괴롭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은 "놀리기에도 너무 불쌍한" 존재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더 어렸던 시기에는 나도 직설적인 놀림의 대상이었다. 동네 친구들은 평소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싸움이라도 붙으면 "~~는 다리가~ 병신이래요~" (멜로디는 다들 상상하는 그대로다) 라는 말로 되풀이되는 노래를 부르며 집 뒷골목을 뛰어다녔다. 나는 당시 하루 종일 집에 있었고 낮 시간은 대개 혼자였다. 그 노래를 못 들은 척, 태연한 척할 필요도 없었다. 혼자 공책을 펼치고 빽빽하게 ‘복수’를 계획하며 시간을 보냈다. 화해를 가장한 편지를 보낸 후 다시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폐쇄된 공간에서 나의 잘 발달한 양팔로 승부를 보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성공했을까?). 


 나는 ‘다리병신’이기도 했지만, 친절이나 걱정의 대상이기도 했다. 동네 할머니들은 낮 시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는 나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아(애)가 이제 목소리도 굵어지는기(게) 아까워서 어쩌나"며 혀를 찼다. 이들이 내게 느끼는 감정이 때로는 고맙기도 했지만, 나의 할머니와 특정한 주제로 자존심 대결을 할 때만 내 처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어떤 말과 행위에 담긴 맥락과 그 동기를 예민하게 파헤쳐야만 했다. 직설적인 공격을 받는 사람들은 그 공격을 ‘못 들은 척 넘기는’ 태도를 훈련해야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친절에도 그 밑바닥의 동기가 나를 이용해 자신을 그저 빛내거나, 자기 존재의 위안을 삼는 것은 아닌지 의식했다. 덕분에 나의 자의식은 모래성처럼 약해지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사납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비하와 혐오감을 동기로 하는 ‘핵토’나 ‘다리병신’이라는 직설적 공격, 또는 친절한 태도 아래에 놓인 시혜와 동정이라는 감정적 동기는 그 출발의 계기는 다르지만, 각각의 도달 지점에서는 동일한 모습을 취한다. 바로 ‘수치심’이다. 미국의 법철학자인 누스바움(M. Nussbaum)은 수치심이란 모든 인간들이 유아기부터 갖는 '원초적' 감정이라 한다. 그녀는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하여 수치심이란 "자신이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감정은 유년기 시절 부모에 대한 절대적 의존관계 속에서 생성되어 모든 인간의 마음 한 곳에 자리 잡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 때를 쓰고 울기만 하면 욕구를 채워주는 부모 돌봄 하에 자란다. 아기일 때 우리들은 그렇게 자신이 전지전능한 어떤 세계에서 태어났다고 잠시 착각하지만 곧 진실을 깨닫는다. 돌봄은 결국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부모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도, 항상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몸뚱어리를 가지고 태어나 이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복수나 반격이란 대개 실패하고, 연민으로 가장된 자기 우월의 태도는 바깥에서 어찌해볼 도리조차 없다). 점차 성장하며 우리의 이상과 현실은 더 벌어진다. 우리는 무력한 존재이며, 세계를 마음

대로 통제할 수 없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의 원초적 기원은 우리 몸의 무력함이지만, 무력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수치심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문제는 나의 무력함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리는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 혼자 높은 선반 위의 물건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서점에서 누군가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높은 선반 위의 책을 꺼내지 못한다면, 나는 그냥 선반 아래에 놓인 책을 선택하고 말 것이다. 아이들에게 놀림받을 때, 우리는 놀림 그 자체보다 내가 좋아하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인 친구의 시선에 더욱 수치스럽다. 혼자라면 복수 계획을 공책에 작성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종종 우리들은 혼자 있을 때에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가? 기숙사 공용 냉장고에 누군가 넣어둔 햄버거를 배고픈 나머지 게걸스럽게 훔쳐 먹는다면, 문득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 것이다. 누구도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지만 나는 수치심을 느낀다. 다른 한편, 만약 당신이 대장질환을 앓아 인공항문(장루)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고, 장루관리에 실패해 용변이 흘러나와 옷을 모두 버리게 되었다면, 역시 아무도 그 상황을 보고 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다. 이는 ‘시선’을 전제로 하지 않는 특별한 수치심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행위를 여전히 지켜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자아가 분리되어 현재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음식을 입에 욱여넣고, 배변주머니가 터져 변이 흘러나온 나를 거울에 비춰보듯 살핀다(즉 반성反省한다). 내가 기대하는 나라는 존재는 아무리 배가 고프고 힘들어도 누군가의 음식을 훔쳐 구석에 앉아 입에 욱여넣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기대하는 나는 용변을 이불에 흘리는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존재이고 말았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되어 있으며, '바라보는 나'의 시선 앞에 수치심을 경험한다.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만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반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자아의 요새


 ‘바라보는 나’의 존재야 말로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는 조건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수치심을 통제할 수 있다.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열두 살 진희는 엄마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사람들은 진희를 안쓰러워하지만, 동시에 기피한다. 진희가 엄마로부터 정신질환을 물려받았을지 우려하기 때문이다. 진희는 어린 시절 사람들이 이 같은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정신의 전략을 터득한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시선을 싫어하게 된 것은. 한동안은 누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엄마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했으며 남에게 그것을 눈치채이기 싫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나'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은희경, <새의 선물>)

 수치스러운 상황을 맞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한 나머지 조리 있게 부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색하게 행동한다면 수치심은 더 커진다. 동정하거나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시선은 이런 태도를 보며 더 많이 동정하거나, 더 크게 혐오하거나, '그러면 그렇지'라며 우리의 존재를 격하한다. 그러므로 이때 해야 할 일은 '바라보는 나'를 안전한 곳에 모셔다 두고, '보여지는 나'를 지켜보며 냉정을 찾는 일이다. '보여지는 나'는 상황에 맞게 적절히 행동해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를 부수지 않고, 그러면서도 나의 자존감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전략을 취할 수 있다. 사회학자 고프먼(E. Goffman)은 장애나 인종 등을 이유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앞에 놓인 사람들을 ‘낙인자’들이라고 부르는데, 그에 따르면 낙인자들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공식’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이 책은 1950년대에 쓰였다. 2017년과 비교해보라). 


“아이구, 가엾어라. 그래 어쩌다 몸이 그렇게 됐니?;”; “우리 증조부도 몸이 너처럼 그랬단다. 그래서 난 네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안단다”; “거봐 내가 항상 말했잖아. 그런 사람들은 가정적이고 착해서 같은 처지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 준다.”; “그래 너는 이런 몸을 해갖고 목욕은 어떻게 하니?” 


 ‘보여지는 나’는 이러한 형식을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는 일종의 공식을 만들어 그대로 응대한다. 고프만은 위와 같은 말들에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낙인자들의 처지에 동정적이기만 하다면, 마음대로 그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동정적이기만 하다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갖추되 적당한 넉살로 받아쳐라. “아이구, 가엾어라. 그래 어쩌다 몸이 그렇게 됐니?” “장애인 할인을 받기 위해서죠.” 상대방이 더 큰 권력을 가졌고, 자신이 나를 동정함으로써 자기의 위신과 성숙함, 선량함을 보여주려는 사람이라면, 그 동정심에 부합해 주어야 취업과 승진에 도움이 된다. “우리 삼촌도 자네처럼 몸이 불편하셨다네.” “그러셨군요. 어쩐지 그간 제가 만난 다른 분들과 다르셨습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반면, 직접적으로 당신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럽고 짜증이 솟구치더라도 결코 분노해서는 안 된다. 레스토랑에서 “손님. 우리는 장애인분들 식사 예약을 안받습니다. ‘노키즈존’ 아시죠? 그런 취지예요”라고 말한다면, 냉정하게 그것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증거를 수집하고, 부당함을 지적하라. 하지만 반 아이들 전체가 나를 ‘핵토’ 라거나 ‘다리병신’이라고 놀린다면, 그저 ‘보여지는 나’가 분노와 서러움에 복받쳐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우선 지켜야 한다. 모래성이 되어버린 자기를 지키는 일. ‘바라보는 나’에게 나의 본질(그런 것이 있다면)을 온전히 이양시키면 ‘보여지는 나’가 겪어야 할 따돌림과 놀림을 견딜 수 있다. 그보다 약한 정도, 예를 들어 누군가의 손에 휠체어에 탄 채 들려 계단을 올라야 하거나, 시각장애가 있어 앞에 물건을 떨어뜨려 당혹스럽다면, 부끄러워하기보다 능청스럽게 말하라. "오 깃털같이 가볍죠? 이 휠체어가 비싸거든요" 내가 아는 한 시각장애인은 자주 이렇게 대응한다.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사람들은 이런 태도에 잘 반응해주기 마련이다. ‘바라보는 나’는 ‘보여지는 나’의 이 모든 연기를 지켜보면 된다. 동정과 무시, 무력함과 부끄러움의 감정을 그저 관조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원칙들 속으로 세련되게 스며들라.  


 이처럼,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섬세하게 분리되는 자아를 획득할 때,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춘다. 나를 놀리며 달려가는 아이들을 향해 눈물을 터뜨리며 억울해하고, 슬퍼하고 좌절해야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놀림의 한가운데에 있는 나를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면서, 우리의 ‘진짜 자아’는 요새 속에 숨겨둔 채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일이야 말로 종국적 승리가 아닐까? 감정과 신체의 직관적 반응을 철저히 통제하고 장기적인 생물학적, 사회적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팔다리가 없고, 얼굴에 화상을 입고, '핵토'라고 놀림받고,  '다리병신'으로 사는 인간들이 취해야 할 삶의 전략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나’를 ‘보여지는 나’와 분리하여, 타인들의 직접적인 시혜적 태도, 무시, 비하, 과도한 친절 등에 떳떳하고 기지 넘치게 대응하더라도, 방안에 혼자 남겨진 순간 찾아오는 수치의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반성적 자의식을 가진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자신의 모습과 자신을 둘러싼 사태의 전개를 하나의 대상이자 영화의 장면처럼 관찰한다. 그러는 동안 ‘진정한 자아’를 요새 안에 숨긴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더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의문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 의문은 세상을 연기하는 나(보여지는 나)를 관조하며 적절히 지휘도 하던 ‘바라보는 나’ 역시, 어느 순간 더 깊은 곳에 존재하는 시선에 관찰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다시 대상으로 바라보는 나가 출현하는 셈이다. 


 이러한 ‘바라보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나’가 던지는 질문은 당신이 화상을 입은 얼굴로도 당당히 대중 앞에 나서고, 작은 키와 ‘핵토’라고 불리는 모습으로도 아이들의 놀림을 거침없이 돌파해 하루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때조차 불쑥 제기된다. ‘바라보는 나’는 그 모든 상황을 관조하며 자신을 지켜냈지만, 군중 속을 벗어나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방에 불을 켜고 양치를 한 후 침대에 앉았을 때 질문을 받는 대상이 된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 잘 해냈다... 

그런데 왜 나는 매일 이래야 하지? 이렇게 분투하여 세상에 살아남을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나는 최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사에서의 점심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긴 글로 작성하고 있다. 

하지만 분투가 너무 바빠 긴 글을 쓸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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