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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Mar 05. 2022

2. 산책하듯 학교 가는 초등학생

처음 사귄 친구



초등학교에 가려면 30분쯤 걷고, 버스를 타고 또 30분쯤 달려야 했다. 학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에 가는 긴 여정을 좋아했었던 것은 생각난다. 조금 빠른 아스팔트 길 대신 둘러가는 산 길을 걷기 위해 아침마다 분주했던 것도, 집을 나서면서 설레던 마음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헉헉대며 오르지 않았으니 어쩌면 산길보다는 산책길에 가까웠을 숲길이었다. 숲길에 들어서면 공기가 조용히 바뀐다. 빼곡한 나무들 덕분에 조금 어두워지고, 밤새 내린 이슬 덕에 촉촉해진 공기가 '우리는 너를 좋아하고 있어'라고 말하며 반겨주는 것처럼 인사했다. 

낙엽 사이로 낮은 풀들이 빼곡히 올라와 어디가 걷는 길인지, 걷지 말아야 하는 길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진 숲은 발걸음 하나하나 주의해서 걸어야 했다. 집이 있는 달팽이랑 집이 없는 달팽이들이 사방에 미끄러져 다니기 때문에 잘못하면 밟을 수도 있었다. 주의 깊게 땅을 보며 걷다 보면 매일 새롭게 발견되는 나뭇잎들이 있다. 동그스름한 것, 길쭉한 것, 나뭇잎같이 생긴 것, 뾰족뾰족한 것 등 크고 작은 잎들은 매일 발견해도 매일 새롭게 등장했다. 이미 좋은 친구가 충분히 있는데 계속해서 좋은 친구들을 소개받는 것처럼 일일이 다 좋아하기도 벅차게 그렇게 등장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금세 풀잎들의 세계로 접속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자주 시간을 잊었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아타고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발을 내려다보면, 축축해진 발끝에 풀 몇 가닥이 붙어있다. 숲길을 지나온 나를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질세라 조심조심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올 때는 버스 시간 때문에 아스팔트 길로만 올 수 있었다. 아스팔트 길 양쪽으론 연두색 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아스팔트 길이 끝나는 곳에 우리 집만 하나 있었다. 아스팔트 길 양 옆에는 논이랑 분리되는 작은 개울이 있었고 그곳에 사는 개구리도, 작은 물고기들도, 벼메뚜기도, 나팔꽃도, 계란꽃도, 민들레도 이름 모를 풀잎들도 전부 내가 오는 길을 반겨주어서 집에 가는 길을 자꾸만 더뎌지게 했다. 나팔꽃은 가장 열렬히 반겨주는 친구 같아서, 계란꽃은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 같아서 특별히 더 좋아했다. 어느 날은 길가에 쌓아둔 볏짚 위를 걷다가 뱀을 밟을 뻔한 적도 있다. 


이렇게 말하긴 좀 간지럽지만 이 길의 나뭇잎들과 꽃들, 그 속에서 살고 있던 많은 생명들이 초등학교 때 사귄 나의 첫 번째 친구들이다. 그 후에 은혜라는 예쁜 친구가 생겼지만, 갑자기 시골로 이사와 조금 외로웠을 나에게 처음 생긴 친구는 분명 자연이었다. 자연 입장에선 나랑 안 친했다 말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내 입장에선 베프였고, 그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사는 집은 늘 오르막 끝에 있는 창밖이 초록인 집이다. 여의치 않으면 나무 하나라도 꼭 있는 집이어야 했다. 좋아하는 친구가 옆에 있어주면 무엇이든 해 볼 용기가 나는 법이니까. 그렇게 집을 골랐다. 산꼭대기 작은집을 선택한 건,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 가장 욕심을 낸 결과물인 것이다. 


사람들이 왜!? 갑자기! 하필 구례?!! 에 가느냐고 묻는다. 대단한 이유는 없고 그냥 욕심의 스케일이 커진 것뿐이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그곳에, 벚꽃과 산수유가 눈길 닿는 모든 곳에 피어있는 그곳에, 섬진강이 그림같이 흐르는 그곳에, 나도 있고 싶으니까. 


lucy가 어렸을 때 필름으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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