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시절 제 사수이셨던 K차장님과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를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테리어 전시회에도 데려가 주시고, 취향 저격의 일본 드라마도 보여주셨던 분이지요. 마침 최근 읽고 접했던 여러 책과 소재들이 차장님도 좋아할 만한 것들이라, 차장님도 보시라며 신나서 이것저것 주워올리는 제게 차장님이 얘기하셨습니다. "신혜도 좋아하는 일 하고 살아야 할텐데. 신혜는 사서나 큐레이터가 어울린다."
그 말이 마음에 남았나 봅니다. 회사 생활 12년째, 가정과 회사에서 여러 역할을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요즘. 이제 좋아하는 일, 하고싶은 일쯤은 별로 마음 아프지 않게 밀어두고 눈 앞의 일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소망은 다시금 올라와 마음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언젠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늘 품고 지내지만, 그 길로 갈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올라왔지요.
그럴 때 제가 위안을 삼는 것은 인생 느즈막이 되어서 자신의 일을 시작하고, 빛나게 만개한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미국의 국민 화가로 불린다는 '모지스 할머니'도 그런 분이었어요. 무려 1,600여 점의 그림을 남긴 할머니가 그림을 시작한 나이는 76세. 자신에게 그림이라는 재능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림을 그릴 여유도 없었던 그 나이까지 해온 일은 그저 매일의 일상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이었지요. 10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중 5명을 먼저 하늘로 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 시골 농장의 아낙으로 살며 안팎의 살림과 여러 가내 수공 작업을 행해오면서. 손가락 관절염으로 인해 더이상 자수를 놓지 못하게 됐을 때에야 모지스 할머니는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했어요. 지난 유년 시절부터의 기억들과, 눈 감으면 펼쳐지는 푸르른 마을의 풍경들과, 가족과 이웃과 함께 해왔던 그 많은 행복한 기억들을요.
그림에 큰 감흥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저도 책에 소개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서는 탄성과 함께 아기자기한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었습니다. 정식 그림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가 그려낸 그림 속의 인물 하나하나는 어쩜 그리도 제각기 살아 움직이며 그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은지요. 하얀 눈이 쌓인 겨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밖에 모여 솥을 걸어놓고 단풍나무 시럽을 끓이는 동안 아이들은 어울려 놀이를 합니다. 색색의 퀼트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운 네 아이들의 그림에서는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린 화가와 하나가 되어 친절히 설명해준 저자 덕분에 저도 그림 구석구석에 시선을 두고 따뜻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날들은 쓸모 없는 날들이 절대 아니라고. 이 날들이 언젠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의 풍성한 재료가 되어 내 삶을 완성할 것이라고. 그러니 매일 맞닥뜨리는 하루 속에서 삶의 자세를 훈련하고, 행복의 순간들을 발견하고 기억해 보자고요. 자신의 그림으로 그가 살아온 삶을 꾸러미째 안겨준 모지스 할머니와, 끊임없이 삶을 일궈낸 다른 인생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ㅇ같이 읽으면 좋을 책: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_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는 모지스 할머니의 생과 함께 그림을 소개해 주는 책이고,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는 모지스 할머니의 자서전에 가까운 책이예요. 후자는 저도 아직 못읽어봐서 어서 읽어볼 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