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몬순 Jun 07. 2022

선녀가 아이 셋을 낳았다면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선녀가 아이 셋을 가질 때까지 절대 날개 옷을 보여 줘선 안돼요!"


아이에게 '선녀와 나무꾼' 책을 읽어주다 나는 사슴이 나무꾼에게 얘기하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멈칫했다. 어렸을 때는 선녀가 양쪽에 아이를 하나씩 안고나면, 남은 아이 한 명을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런 것 일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 부분이 삐딱하게 읽혔다. "아니, 왜? 왜 애가 셋이라고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양팔에 하나씩 안고, 나머지 하나는 다리 사이에 끼고 가던 가. 포대기로 업던가. 아기띠라도 하면 되지!" 나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옆에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애 셋이면 자신이 선녀였다는 사실도,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도 잊을 만큼 육아에 정신없을 거란 얘긴가? 아니면, 어차피 스스로 모든 걸 체념하고 포기하게 될 테니 날개옷을 보여줘도 괜찮다는 얘긴가? 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걸 전래동화라고...  


그렇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이 대목에서 발끈하는 나는, 아이 셋 엄마이다. 대한민국 합계출산율이 1명 미만인 시대에 남 다른 가족관을 가진 애국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고백건대 나도 몰랐다. 내가 아이 셋, 그것도 아들 셋 엄마로 살게 될 줄은. 첫 째의 성원에 못 이겨 가진 동생이 쌍둥이었으니,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홀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모험 넘치는 삶을 살 줄 알았던 내가, 집에서 아이 셋과 씨름하느라 진을 빼고 있으니 이 동화책이 그렇게 도발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씩씩대는 내게 남편이 왜 그러느냐고, 떠나고 싶어서 그러냐고 묻는데, 순간 정제되지 않은 속엣말이 쏟아져 나와버렸다. “애들 셋 다 키워 놓으면, 바바리 하나 걸치고 담배 하나 물고 멋지게 떠날 거야!” 눈앞에는 이미 트렌치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어가는 시크한 여인의 습이 떠올랐지만, 왠지 모르게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 그렇게 홀가분하거나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던 말을 입 밖에 내뱉고 보니, '정말 그게 맞는 걸까?  그러면 행복할까?'라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괜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부모로 사는 삶은 생각보다 도전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부족한 시간을 아이와 나눠 써야 했고, 이 한 몸 건사하며 산다면 견디지 않아도 될 일도, 견디며 해야 할 때가 많았다. 큰 아이가 어릴 때는 매일 일하러 나가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취미 생활을 하러 가는 것도 죄책감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온종일 엄마가 퇴근할 시간만 기다리는 아이를 생각하면 취미 생활이 가당키나 한가 싶으면서도,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삶 속에 내가 소멸될 것 같아 나는 괴로워했다. 첫 째 때는, 모든 것이 다 처음이었기에 더 마음 아파하고 더 미안해하며 아이를 위한 시간과 나를 위한 시간을 저울질했다.


쌍둥이를 낳고 나서 경험한 갓난아기 육아는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있었다. 종일 집안에 갇혀 두 아이의 울음소리에 시달리다 수유를 하고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먹이고 안고 토닥이기를 반복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몽롱한 상태로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되는 생활이란, 왜 신은 천사를 주시고 지옥을 살게 하셨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남편이 그나마 일찍 오는 날은 잠시라도 카페로 도망쳐 나올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주님 도와주세요를 외치다 쓰러져 잠들었다. 젊었을 때 이라크 파병을 다녀온 남편도 군대보다 육아가 훨씬 힘들다고 할 정도였으니... 쌍둥이 갓난아기 육아는 순도 100%의 피로로 매일 나의 한계를 시험했다.


아이들이 커가고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도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아침마다 엄마 회사 가지 말라고 양다리에 매달렸고, 우는 아이를 간신히 떼어두고 나온 직장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진급에서 누락될 때나, 정신없이 일하다 안 하던 실수를 하는 날은 기운이 더 빠졌다. 젊었을 때 동료들과 소소하게 누렸던 직장 생활의 즐거움이야 진즉 기대를 접었지만, 고생을 해도 인정은커녕 자괴감만 드는 상황을 자주 마주하다 보니 '엄마도 회사 가기 싫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밤새 엄마 젖을 뒤적거리며 찡얼 대는 아이들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도 없는데, 새벽같이 출근해 일하다 퇴근 없는 육아를 저글링 하다 보니 일도 육아도 자주 덜컹댔다.  


어느 주말에는 카레를 만들고 식사 준비를 마쳤는데, 그제야 밥이 없는 걸 발견하고 급히 쌀을 안친 적이 있었다. 배가 고픈 남편이 햇반을 사 올까 묻는 것도 말리며 한참을 밥이 되길 기다렸는데, 웬걸. 뚜껑을 열어보니 밥은 없고, 생쌀만 뜨겁게 데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전기밥솥에 물도 안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다니...  남편이 걱정스레 메마른 쌀을 버리고 손수 다시 밥을 지은 그날 아침, 나는 밥을 먹다 서글퍼 울어버렸다. 수면 부족과 누적된 피로에 뇌기능이 떨어진 것인지, 이러다 정말 무슨 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뜨겁게 달아오르기만 했지 먹을 수 없었던 그날의 생쌀처럼 나도 메말라 있었다.


'아이 셋을 낳은 선녀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나는 내게 물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