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주영 Mar 03. 2024

퇴사했고요. 다시 입사했습니다.

네 번째 이직이지만, 여전히 쉽지 않음

이직을 했다. 직장생활을 이십 년 넘게 하면서 건강보험증 기록 상으로는 열 번 가까이 적을 옮겼지만, 계열사 이동 같은 것을 제외하고, 굵직한 것만 따지면 네 번째 이직, 다섯 번째 입사이다.


분명 '나에게 더 이상 이직이란 없다, 퇴직만이 있다'라는 마음으로 직전 회사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인생사 어디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회사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고, 더 이상 남아있기 힘든 상태에서 괴로워하다가 퇴사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편해졌을까? 이직하고 4주가 흐른 지금 엄청난 스트레스 한가운데 있다. 일에 관한 꿈은 당연하고, 잠꼬대를 하고, 알람보다 1시간 먼저 눈을 뜬다. 월요일에 대한 공포는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이직 2개월 차에 접어들며 아직 혼돈의 중심에 있는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몇 개월이 흘러 (부디) 적응했을 나에게.. 과거의 개고생을 잊지 말라는 조소 어린 편지 같은 것이고,

이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장이기도 하며,

이미 이직 후 스트레스로 허우적거리는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하여 시작해 본다.




난 첫 번째 회사에서 만난 몇몇 분들과 아직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사원이었던 내게 바로 윗 선배였던 대리님들이 그러한데, 시간이 흘러 그분들은 차장, 부장 더 나아가 이사님이 되기도 했고, 당시의 부장님은 부사장님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몸서리를 치며 뛰쳐나온 곳이 그리 이상한 곳이 아니었으며,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성과를 내고 (아마도)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옮겨 다니는 것일까?


어제 봤던 유튜브 조승연의 탐구생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불안감/불안정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이

1)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거나

2) 중독적 성향이 강해 그 일의 끝장을 보고 만다는 것.

내가 불안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 새로운 것, 자극, 그 경험에 대한 몰입을 추구한다는 것은 나를 꽤나 잘 설명하는 듯했다.


아래의 그림에서와 같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고, 만족할 때까지 몰입하고 나면, 다시 새로운 경험을 찾아 떠나는 무한루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회사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제 발로 뛰쳐나온 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성향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몰입하는, 누가 시키지 않았도 자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즐기는..

즉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가만있지를 못하는가- 진득이 견디지를 못하는가- 에 대해 자책을 줄이고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새로운 것들을 추구한다고 해서, 새로운 환경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내가 이전 팀원들에게도 간혹 했던 말이 있다. '작은 파도를 많이 타봐야 큰 파도도 탈 수 있다' 회사 내 다양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다.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니 마치 파도타기에 능한 사람 같지만, 이직 후 지난 몇 주일 동안의 나는 집채만 한 파도에서 여전히 중심을 못 잡고 있다. 당연히 서핑보드 위에 올라타지 못했고 간신히 서핑보드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모양새인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고개를 들어 어디로 휩쓸리고 있는지는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내가 그래도 방향을 감지하게 된 방법은 무엇일까.


1. 나의 맥 못 춤은 당연한다.


나는 팀장으로 입사했다. 즉, 이미 10명이 넘는 팀원들이 있고, 굴러가는 서비스가 있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상태다.


들어가자마자 정보들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의사결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해도 힘든데 결정이라니, 숨이 막혀왔다. 입사하고 몇 주가 지났으니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그렇지 않은 나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다. 일찍 나오고 늦게 들어가는 것으로 되지 않았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나 싶었고, (실제로 노트북을 계속 싸들고 왔다.) 얼마를 더 하면 나는 이 팀의 업무를 이해하고 판단할 것인가 막막했다.


그러다 이전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에서 선배 언니의 말이 섬광처럼 다가왔다.


'야, 나이 먹으면 당연히 이해력이 떨어져.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아직 한 달도 안 되었다며, 당연한 거야'
'주말은 지켜, 그렇게 초반에 소진해 버리면 오래 못한다. 결국 큰 차이 없어'


나의 노력과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니. (물론 조금 더 똑똑하다면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나의 이 상황은 이직러라면 모두 겪는 문제이고, 나이가 들었다면 조금 더 힘든 것이 당연하다니... 단지 그순간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 가볍게 던지는 말들이 아니었다. 서로 직장생활의 위치와 자리는 다르지만, 무게와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고 또 먼저 느꼈을 선배가 하는 말들은, 진짜였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그녀였기 때문에 흩어져버리지 않고, 나를 견디게 하는 말들이 되었다.



2. 모두 잘 할 수는 없다.


지금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소환을 당한다. 슬랙에서, 깃허브에서, 이메일에서.. 온갖 협업 도구에서 쉼 없이 나를 태그하고 참조하고 있다. 또한 궁금한 정보를 찾을라치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수많은 이슈들이 연결되어 따라온다. 대체 무엇이 파이널 버전인지 찾기도 힘들고, 이 텍스트가 갑자기 왜 나왔지? 하며 히스토리를 파악하는 데에 애를 먹는다. 모래 폭풍이 부는 사막에 혼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의 모래 싸대기에 정신을 잃어가다가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대책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초기에 나를 지탱할 마음가짐, 회사에서의 기조를 세워보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모르는 것을 아는 체 말고, 잘하는 것부터 하자

현재 이 회사에서 그리고 내 상사가 나에게 기대했던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무엇일까? 나는 원래 무엇을 잘했던 사람인가? 를 생각해 보았다.


짧은 시간에 내 능력을 다 보여주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느니, 내가 정말 잘 하는 것부터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나는 사업개발 전문가 아니던가. 팀원들의 마음을 잘 만지는 조직장이 아니었던가. 일단 거기서부터 역량을 보여주자. 나머지는 팀원들에게 맡기자. 내 전문 분야가 아닌 것들까지 직접 다 하려고 나서지 말자. 다짐했다.


모든 이메일과 문서를 전부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반드시 내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면, 업무의 분위기와 방향만 파악하려 했다. '이 업무가 이것이구나, 아까 그것과 비슷한 주제구나. 리스크가 발생했으나 OOO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겠다.' 정도로만 따라가기로 했다.


물론 이런 마음가짐들이 누군가는 못마땅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해달라고 데려왔는데, 소극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들 어쩌겠는가. 난 이미 여기 왔고, (내보낼 건 아니잖아요?) 난 여기서 한두 달 일하고 떠날 프로젝트 멤버가 아니고, 몇 년 간 이곳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사람이니 길게 보기로 했다.


나의 마음과 에너지를 아껴 쓰기로 했다. 초반에 다 터버리지 않도록.


3. 아군을 하나씩 늘려가자.


이직이 어려운 것은, 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현재 대략 스무 명에게 둘러싸여 있다. 팀원들과 그리고 몇몇의 동료 팀장, 그리고 내 위 상사가 주위에 있다. 내가 여기 왔다는 것이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움이 되어주길 기대하는 사람도 소수 있을 것이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 그러나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1-2년간 함께 일해온 이들 틈에서 자리 잡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래도 작은 실뿌리라도 한가닥 한가닥 내려서, 나를 지탱해 줄 지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나를 기다려주거나 이해해줄 아군이 필요하다.


1)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쉽다. 나에게 기대가 없거나 크지 않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간다. 업무적으로 가벼운 관심을 표현하거나, 사비를 들인 선심도 괜찮다.


2) 나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솔직히는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의 마음을 얻기는 쉽지 않다. 빠른 시간 내에 되지 않는 일이다. 급히 다가가려고 하기보다 거리와 시간을 두면서 그를 파악해 보는 것이 좋다. 저 사람의 업무 상황에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 저 사람의 욕망은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의 호의와 능력을 보여주며 '내가 너를 돕는 사람이야. 너를 해치지 않아.' 라는 무드를 만들어 준다면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3) 나에게 기대가 큰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가장 어렵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테니까.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난 주로 이들을 피해 다닌다. 초반에 뭔가를 보여주려 애쓰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실망도 할 것이다. '엇? 왜 바로 뭔가를 해결하지 않지? 저 사람의 능력이 이게 다였나?' 이러한 의문을 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의 열정과 능력은 전달되지 않을까? 초반부터 무리하여 능력을 과시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과한 액션은 헛발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마음을 다잡은 척 글을 써보았으나, 나는 내일도 불안과 긴장 속에서 출근을 할 것이고,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눈들과 쏟아지는 참조 사이에서 맥을 못 추고 흔들리다가 터덜터덜 퇴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건대

어느 순간엔 업무를 명쾌하게 파악할 것이고,

마음을 터놓을 동료도 생길 것이고,

중간중간 딴짓을 할 여유도 찾을 것이다.


그런 나는 몇 개월 뒤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러하리라- 주문을 외며 이 글을 마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