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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Feb 08. 2024

내 이력서가 안 보이나요?

복귀를 앞두고 작고 나약해진 나...?!

그냥 노을이 예뻐서


어느새 아이의 돌이 다가온다.

그 말인즉슨 나의 일상 복귀도 코앞에 왔단 말이다. 여기서 일상 복귀라 함은, 방송작가로 일을 다시 시작하는 걸 말한다. 물론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일반 회사원처럼 출산과 육아 이후 다시 돌아갈 곳이 보장돼 있진 않다. 직전에 했던 프로그램은 1월 말까지 하고 그만두었다. 아기를 2월 말에 낳았으니 산달 직전까지 다닌 셈이다. 팀원들에게 1년 후 다시 돌아오리라, 기약하고 떠났지만 내가 그만두고 몇 달 후 프로그램이 폐지됐다. 그새 나는 아이를 키우고, 다른 작가들은 각각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아이를 낳으면서 딱 돌까지만 육아에 전념하고 다시 일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 사이 나의 모든 일상은 육아로 점철되었다. 육퇴를 하면 피곤함을 보상받기 위해 구독한 ott 신작을 모조리 섭렵했다. 내 86인치 티브이를 이렇게 썩히긴 아까우니까, 그냥 자긴 아쉬우니까, 일단 뭐든지 틀고 보다가 자는 게 일상이자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달까.


물론 1년간 얻은 것도 있다. 아이의 잠 루틴을 잡는 방법이라던가, 먹텀(먹는 텀), 먹놀잠(먹고 놀고 잠) 등의 '육아어' 그리고 엄마로서의 내공.(그래봤자 한참 모자라지만) 이 생활도 이제야 좀 적응이 될까 말까 한데, 어느새 시간은 흘러 내가 정한 데드라인이 다가와 버린 것이다. 나는 1년의 공백을 뒤로한 채 수많은 방송사에 내 이력서를 낱낱이 공개해야 하는 시간을 마주해 버렸다.




언제나처럼 이력서는 호기롭게 쓴다. 아니 쓸 것도 없다. 그간 정리해 둔 이력 몇 줄이 나를 설명해 주니까.

방송작가 단톡방이나, 협회에 올라온 구직글에서 흥미가 가는 방송이면 모조리 이력서를 넣어본다. 사실 아이 돌 행사를 다 끝내고 난 뒤 천천히 넣을까 했는데, 조바심에 1월부터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연락이 올까, 어떨까 하는 일말의 설렘이 있다. 하지만 이력서를 넣는 개수가 늘어날수록 불안감은 치솟는다. 아니, 이렇게 많은 이력서를 넣었는데 왜...? 혹시 내 이력서 파일이 안 열리나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지금까지 10개는 넘게 지원했고, 그중 단 두 곳만이 연락을 주었다. 연차가 낮았던 옛날에는 적어도 면접은 봤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예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조차 귀해진 것이다. 하필 이력서를 넣고 나니 여론조사 전화는 왜 이렇게 자주 오는지 원... 연락 온 두 군데 중 한 곳에서는 뜻밖의 압박면접(?!)을 본 터라 멘털이 좀 나가버렸다. 내가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다시 일을 하겠다고 한 거구나.




나 이러다가 정말 일 못하는 거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 다행히 한 곳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불안하다. 내가 그동안 깜빡했던 프리랜서의 '불안정함'이, 워킹맘이 될 나에게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아기도 있고, 나이도 서른 중반을 향해 가니 이상하게 쪼그라드는 것이었다. 소싯적 "아무리 그래도 나 하나 일할 자리는 있겠지" 했던 패기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생각이 어지럽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을 움직이려고 한다. 주 3회 가던 요가를 매일 갔다. 생각이 많을 땐 아쉬탕가처럼 힘들어서 잡생각이 안나는 걸 해야 한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나에 대한 자괴감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뿌리치려고 애썼다. 땀을 뚝뚝 흘리는 그 순간에는 잠깐 잡념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머리서기를 하고, 언제나처럼 다리를 말아서 들어 올린 채 뻗질 못하고 무너진다. '이거 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결국 이런 생각까지 들어버린다. 나는 오래 일하고 싶은데, 한 해가 지날수록 이 직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만 남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얼마 전 이슬아 작가의 신간을 읽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글도 감명 깊었는데, 더 가슴 깊이 박힌 건 그녀 또한 작가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거였다. 매일매일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표하고 싶은, 몇 권의 책을 냈고 드라마 작가로도 나선다는, 그런 그녀도 불안하구나.  그녀 또한 요가를 좋아해서, 대안으로 요가 강사 자격증을 따볼 생각도 단했다. (물론 나는 요가를 사랑하는 것에 비해 실력은 출중하지 못하여 꿈도 꾸지 않는다)


뜻밖에 읽게 된 책 한 권으로 잠시의 위안은 받았으나, 사실은 아직도 나의 불안함은 진행 중이다. 1년간의 공백, 그 사이에 늘어난 부양 가족(=나의 아이), 출산으로 인한 크고 작은 건망증, 삼십 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 불안감이 나를 덮치니, 그렇게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나 외의 주변 모든 이의 삶이 부러워진다. 그러다 또 정신을 차린다. 사실 이들도 나랑 똑같은 고민이겠지...


답답한 마음에 친한 작가언니에게 연락을 해봤다. 그녀 또한 7개의 이력서를 넣었건만 단 한통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우리 빨리 새 직업을 찾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다가도 그래도 결국은 어떻게든 살아남아보자, 알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한 거야!라는 참 진부한 말로 응원을 건넨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지가 있어 그나마 편안해진 맘이다. 맨날 투덜거리며 일한다지만, 그래도 내심 바란다. 부디 오래오래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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