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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기고] 일하는 여행자의 시간

Vol 6.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중에서

쉿,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 하루에 다섯 시간만 일하면 되는 세상이 있다. 월화수목금, 하루 다섯 시간씩. 아홉 시에 시작한다면 두 시에 끝난다. 그곳에서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어떻게 그 나머지 시간을 보낼 것인가? 이는 곧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란 질문과 같다.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가는지가 곧 ‘내’가 될 테니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이것은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내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유럽과 남미를 각각 5개월 간 ‘머무르며’ 여행했다. 한 나라에 한 달 혹은 그 이상, 느리게 돌아다녔다. 나의 여행 방식은 ‘헬프엑스’라고 부르는데,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호스트)를 찾아 하루 대여섯 시간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으며 장기간 그곳에 머무르는 여행이다.   

   

영어로 말하든, 이탈리아어로 말하든, 독일어로 말하든, 사람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비슷하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일상을 꾸린다. 일상을 꾸려가는 동안 손길이 다 닿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따뜻한 한 끼의 저녁밥을 짓거나, 아이들의 코스튬 의상을 만들어주거나, 봄기운이 올라올 때 마당의 잔디를 깎고 어린 사과나무의 가지를 돌보거나, 집을 비운 주인을 대신해 반려동물의 끼니를 챙기고 빈집을 돌보는 등의 ‘일상’의 일. 나는 그런 도움을 주며 그들과 함께 살았다. 대단한 도움은 아니었지만, 일상이란 가벼운 붓 터치만으로 생동감이 더해지는 수채화 같았다. 누군가의 일상은 내가 조금의 붓질을 더할 수 있는, 여백 있는 그림이었다.      


하루에서 그 대여섯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 그러니까 이른 오후부터 밤까지의 ‘빈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소리 없이. 아니, 정확히는 커다란 시간 한 뭉텅이가 ‘쿵’하고 내 앞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비어 있으나 동시에 빽빼하게 채워진, 엄청난 밀도의 자유. 헬프엑스 여행에서 나는 그런 잉여 시간을 손에 쥐었다. 처음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생 때도, 직장인이 되었을 때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라는 건, 인식하기 시작한 이래 거의 항상 ‘없는 것’이었다.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아래는 프랑스의 철학자 폴 발레리의 말이다.  

   

대도시의 문명인은 다시 야만 상태로, 다시 말해 고립 상태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메커니즘이 공동체의 필요성을 잊게 하고,
예전에는 결핍에 의해 끊임없이 의식되곤 하던 개인들 간의 유대감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적 메커니즘도 완벽한 상태에 이르면 특정한 행동 양태,
특정한 감정의 발흥을…(중략)…무력화한다.     


대도시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갔던 나의 삶은 그가 이야기한 ‘완벽한 상태’였음을 고백한다. 일면 책임감 있고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인지 몰라도,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나는 시간과 근기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소모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한 나는, 나를 자발적으로 고립시켰다. 주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시간과 마음을 내야 가능했고, 무엇보다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잘 생기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들만 간단히 처리하고 날이 바뀌면 다시 일터로 향하는, 무섭도록 ‘완벽하게’ 안정된 그 일상에서 ‘결핍’이 균열을 낼 자리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모든 것을 다 지켜낼 수는 없다고, 모든 것을 다 누릴 수는 없다고들 한다는 말을 나는 되뇌었다. 내 손에 쥔 얼마 되지 않는 자유의 시간이 소중해 기쁘게 고립을 선택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휴식’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랬던 나에게 잉여시간 뭉텅이는 어떤 의미였던가. 그 어떤 사회적인 관계도, 해야 할 일의 목록도 알람도 없이, 오로지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자유로운 시간. 

뭘 할까?

참으로 행복한 고민이었다. 읽고 싶던 책을 펼쳐 들고, 영화를 틀고, 하염없이 산책했다. 생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주변의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시야에 들어오니 관심의 씨앗이 싹트고, 관계가 생겨나고 내 안에 이야기의 싹이 텄다. 관계는 또 다른 관계를 불러왔다. 참으로 풍요로운 경험이었고, 새롭고 강렬한 감각이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주변에 대한 호기심, 관심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삶의 ‘온기’는 모두 그 잉여 시간에서 올 수 있다. 온기는 내 삶을 덥히고, 생기 있게 만든다.   

   



호기심, 관심, 그리고 온기를 머금은 시선은 바깥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 대상이 된다. 헬프엑스 여행은 진정한 내가 어떤 모양인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군데군데 붙은 비계를 떼어내고 탄력적인 ‘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사람‧환경‧문화… 모든 것이 새로운 곳에서 몇 주일, 몇 달 동안 일상을 함께 하며 ‘나’라는 인물의 국경선을 새롭게 정의했다. 국경선 너머는 나 이외의 모든 것, 내 바깥의 모든 ‘세계’였다.    

  

유럽 헬프엑스 여행 5개월째에 만난 ‘사이먼’이 기억난다. 사이먼은 스페인 최북부의 대산맥, ‘피코스 데 에우로파’ 중턱에 돌 오두막을 짓고 사는 요가인이었다. 아일랜드 사람인 그는 아일랜드에서부터 인도까지를 자전거로 여행하고 인도에서 요가를 수련한 후 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스페인 산맥에 정착했다. 조용하고 강인한 눈빛의 사이먼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율기부제로 요가를 가르치고, 작은 텃밭을 가꾸며 살아간다. 

스페인 산간 지방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오래된 흙돌집에는 전기가 없었다. 당연히 냉장고 등 전열기구도 없다. 와이파이도 없다. 온수는 태양열로 덥히고, 요리는 가스로 한다. 사이먼은 틈나는 대로 두꺼운 <자연도감> 한 권을 펼쳐놓고 야생의 식재료를 연구했다. 필요한 기구들은 대부분 직접 만들어썼다. 물론 인력으로.      

그의 생활 방식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물론 나에게 그렇게 생활하라고 하면 난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건, 바로 지금, 나와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살고 있으면서 그와 나의 관심사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단 사실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건, 그렇게 살아가기로 한 (자신의 시간을 그러한 관심사로 채워나가겠다는) 그의 결심과 결단이었다.  

'사람이 이처럼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구나!'

사이먼의 집에서의 2주일은 그때까지의 나의 ‘시간에 대한 결정’이 어땠는지 크게 돌아보게 했다.      


이처럼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습관을, 의견을 또 사회를 경험하면서 내 생각의 국경선은 수없이 다시 지워지고 그어졌다. ‘나’는 때로 사포질한 목재처럼 부드럽고 둥글어졌고, 때로 대장간에서 담금질된 쇠처럼 더욱 단단해졌다. 수많은 돌아봄에도 변하지 않는 나의 어떤 부분, 그게 ‘나’였다. 양보할 수 없는 ‘나’였다. 여행은 나라는 인물의 선을 다시 그려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의 여행이 주었던 잉여 시간이라는 토양에서 가능했다.     

 



미국인 여행가 폴 서루는 <아프리카 방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떠난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돌아온다.
당신은 결코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 말을 체감한다. 내 여행의 시간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내 안에 남았다. 내 여행의 시간은 소에 맨 쟁기처럼 아주 천천히 내 인생 전체를 끌고 간다. 느리고, 깊고 진실된 방향으로.      




**이 글은 바다출판사의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NewPhilosopher) Vol.6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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