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바랜 아쉬움의 영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Manner Maketh man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흥행이 폭발적으로 일자, 많은 이들에게 후속작에 대한 기대치는 꽤나 높아졌었다. 기대감이 높아진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실망감을 느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킹스맨: 골든 서클>은 꽤 우려를 하고 있었던 부분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꽤 안타깝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겠다.
영화의 후속작은 성공하기 힘들다. 전작이 흥행하면 흥행할수록 후속작은 전작을 뛰어넘을 만한 화두, 이슈를 꺼내야 하기 때문에 흥행의 바람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일리언>처럼 전작을 뛰어넘는 작품들은 존재한다. 다만 극히 드물 뿐이다. 극히 드물기에 전작을 뛰어넘는 영화는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킹스맨: 골든 서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킹스맨>의 경우는 안타깝게도 전작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싶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보여주었던 참신함과 소재의 신선함은 이번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존의 '킹스맨의 가치'를 더욱 극대화할 요소들은 보이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색이 바랜 아쉬움만 끝에 남았다. 전작의 고귀함은 어디 갔는지 메시지는 온데간데없고 오락적인 요소만 남은 영화가 되었다.
<킹스맨: 골든 서클>의 패배 요인은 '기존의 색깔'을 잃어버렸다고 정의를 해야겠다. 대중이 원하는 '수요'인 해리를 살려내면서 그전에 보여주었던 '킹스맨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빛을 바랬다. 죽음을 통해 해리의 '고귀함'을 증폭시켰고, 킹스맨의 가치를 에그시에게 전달하여 킹스맨의 일원이 되게끔 했던 그 스토리 라인과 플룻이 후속작에 이르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콜린 퍼스가 연기한 해리의 가치는 죽음으로 드높였고, 그가 죽었기에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더욱 와 닿는데 일조한 셈인데, 해리를 살려내면서 영화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킹스맨의 가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또한, 해리라는 캐릭터를 살리는데 집중한 나머지 기존의 에기, 에그시의 캐릭터를 잃어버렸다. <킹스맨 에이전트>의 에그시는 막말과 더불어 타인을 위하는 유쾌한 행동을 통해 '킹스맨'이 단순히 격식과, 무게감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님을 보여주었으나, <킹스맨: 골든 서클>의 에그시는 진지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캐릭터로 바꿔 버렸다.
안타고니스트의 힘에 의해 상대적인 상승세를 보여주는 주연들의 모습은 없었다. 주연들이 만들어내는 시퀀스들이 충돌하면서 오히려 상승세보다는 캐릭터들의 매력요소가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에그시의 유쾌함과 정의감은 없어졌고. 해리의 냉철함 역시 환각이라는 요소에 묻혔다. 결국 남은 건 멀린의 최후의 가스펠뿐이었다. 반면, 악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의 '포피'는 전형적인 냉철꾼이자 사업가며 위기의 원동력이자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인 만큼 <킹스맨 골든 서클>에서 가장 극명하고 뚜렷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덕분에 햄버거를 못 먹게 된다는 말은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시퀀스이면서 가장 살아있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건 매너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사람을 다진 고기로 햄버거를 만든 '포피'뿐이다.
어때, 맛있어?
리드미컬한 시퀀스는 전작과 동일하게 이어지지만,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유쾌함'은 상실되었다. 잔인하다고 여길 법한 장면들이 잔인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고 즐겁던 전작과는 달리, 꽤 잔인하다고 여길 법한 코드들이 등장한다. 포피의 햄버거라거나 위스키 요원의 올가미 절단 시퀀스 같은 꽤 잘리고 죽는 장면들이 전작에 비해 적나라하다. 시퀀스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클리셰에서 벗어나겠다 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 같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킹스맨의 유쾌함을 더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웠던 킹스맨의 액션들은 사라졌고 액션만 남고 불쾌함이 증폭된 끝은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액션은 전작에 비해 디테일이 극대화되었다. 다만 이 액션들은 다수의 캐릭터들이 등장함에 따라 조금은 중구난방 한 모습을 지닌다. 캐릭터들의 부분적인 묘사에 따라 액션이 등장하기에 굳이 저런 시퀀스를 넣어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리해서 보노라면, 전체적인 내용은 전작에 비해 러닝타임이 길어진 만큼 괜찮다는 느낌을 지니나, 해리의 캐릭터를 살리는 부분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들인 점. 캐릭터의 '장점'을 전작에 비해 지나치게 못 살리는 점. 안타고니스트의 힘이 전작에 비해 떨어지는 점. 기존의 메시지를 잃은 점. 이 네 가지의 가장 큰 요인들이 <킹스맨>이 지녔던 '힘'을 잃어버려 안타까움만 느낀다. 확실히 대중의 수요를 받아주면 창작자의 아이디어는 물거품이 됨을 뼈저리게 느낀다.
타인보다 우수하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한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다.
전작의 명성에 너무 지나치게 집중한 영화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야 했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영광에 머무르기 바랐던 나머지 스스로 무너진 영화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해리와 에그시가 길을 걸으며 에그시에게 해리가 해준 말이 있다.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보다 오늘의 자신이 더 뛰어나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고귀해지는 것이다."라는 헤밍웨이의 격언이었다. 기존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기 보여주었던 유명세에 답하려는 마음이 결국 <킹스맨 골든 서클>의 패착 요인을 크게 키웠다고 볼 수밖에 없다. 킹스맨이 던진 메시지에 비해 킹스맨은 우수해지지 못했다. 전작에 비해 보다 나아지려면 더 색다르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해리를 살려내면서 과거의 유산을 다시 꺼내는 것이 아니라, 킹스맨의 갤러 헤드가 된 에그시의 내일에 대해 보다 더 명료하고 발전적인 과정으로 접근했어야 했다. 기존의 작품이 '에그시의 킹스맨 되기' 였다면, 킹스맨으로서 에그시의 '활약'이 더 돋보여야 했다. 그러나 에그시는 기존의 해리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고. 해리는 전작에 비해 힘이 뒤쳐졌다. 심지어 이들과 같이 활약한 미국의 스테이츠맨의 경우는 너무 존재감이 없었다. 채팅 테이텀은 대체 왜 등장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위스키는 그냥 짜부가 되었을 뿐이다.
기대가 큰 만큼, 아쉬움이 크다. 기존의 작품에 매달리지 않고 소신껏 달려 나갔더라면 이렇게까지 아쉬움이 있진 않았을 것으로 여긴다. 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꾸밀 수 있음에도 전작의 유명세에 머무른 느낌이 짙다. B급적 코드와 맞물려 나타났던 기존의 리드미컬한 유쾌 상쾌 통쾌의 액션은 사라졌고. 부분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일깨워준 매너는 사라지고 없다. 마치 이 영화는 "내가 전에 말했으니까 이번엔 말 안 해도 되겠지?"라고 언급하는 것 같다. 조금만 더 킹스맨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했다면 '역시는 역시 역시군'라고 했겠지만. 이번엔 그저 아쉬움만 내쉴 수밖에.
한 줄평: '해리'를 살렸더니 '영화'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