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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Dec 22. 2023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을 배

베트남 여행 1 - 무려 15년 만의 하노이 그리고 하롱베이

캄보디아 시엠립을 떠나 향한 곳은 베트남 하노이였다. 시엠립이 엄마께서 두 번째 방문하는 곳이었다면, 내게는 하노이가 그랬다. 엄마도 베트남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 엄마와 내가 함께 간 곳은 다낭과 호이안뿐이었다.


15년 전, 친구와 함께 캐세이퍼시픽 항공을 타고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2주간의 국제봉사활동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스마트폰도 없던 때, 둘 다 난생처음으로 어른 없이 (우리도 법적으로는 성인이었지만) 낯선 나라에 간, 대단히 큰 도전이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자동로밍되는 때도 아니었으니, 로밍폰을 대여해 가서 자 한 통에 띄어쓰기도 생략하고 이야기를 꾹꾹 담아 부모님께 문자하루에 한 통씩 썼던 기억이 난다. 한국과의 긴 대화는 이틀에 한 번 정도 방문하던 PC방에서 메일로 가능했다. 그야말로 ‘라떼는’ 이야기다.


아무튼, 봉사활동 기간 중 어느 주말, 같은 캠프에 참가한 봉사자들 전원과 함께 1박 2일간의 하롱베이 여행을 다녀왔다. 배에 올라 하롱베이 만을 구경하며 동굴과 섬에 들렀는데, 무 오래전이라 이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번에 갔던 곳들과 동일한 곳들이었던 것 같도 하다. 당시의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 대학에 와서 처음 사귄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적느라 바빴으니, 아쉽게도 그때의 생생한 기억은 내가 아닌 그 친구에게 전달되다. (지금은 그마저도 사라졌겠지만)



럼에도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건, 위태로운 밤바다의 기억이다. 우리 배 위에서 하룻밤 자는 일정을 택했는데, 낮까지만 해도 조금 흐리긴 했지만 큰 불편함 없이 잘 구경하고 다녔다. 중간중간 비가 조금 내렸던 것도 같지만, 심하지는 않다.


그러나 밤이 되자, 천둥번개가 치면서 배가 이쪽저쪽으로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객실도 있으니 아주 작지만은 않은 였는데도 배는 중심을 쉽게 잡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식당으로 소집되었다. 식당의 테이블들은 가운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다행히 바닥에 고정된 테이블과 의자들이었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다 같이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하며 아날로그식으로 배의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We’re all gonna die here!’ (우린 모두 여기서 죽을 거야!)


베트남인 친구 한 명이 농담 반, 두려움 반 담아 외쳤다. 나는 설마 배가 정말 뒤집히기야 하겠냐는 생각이었지만 워낙 겁이 많았으므로 (지금도 많다) 친구의 말에 온전히 웃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왔다 갔다 수 차례를 반복한 끝에, 파도는 겨우 잠잠해졌다.


이후 숙소에 들어가서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일단 한 번 평온해지고 나니 그 이후로는 파도가 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까지도 그 평화로움이 지속되었고, 우리는 무사히 항구로, 그리고 하노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번에 탄 배 vs 15년 전에 탔던 배


이번에 탄 크루즈는 15년 전에 비하면 훨씬 더 큰 배였다.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이니 일부러 제일 좋아 보이는 배로 예약했다. 하룻밤을 자는 건 아니었지만, 폭풍우가 설사 친다고 해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균형을 맞출 필요는 없을 배였다. 넓고 깔끔하게 정돈된 식당에 앉아있으니, 15년 전의 어수선했던 밤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우왕좌왕했던 기억은 비단 그 배 위에서만이 아니었다. 홍콩을 경유해 베트남으로 들어갈 때 홍콩의 입국신고서를 써야 할지 말지를 몰라서 승무원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던 일, 하노이 공항에서 캠프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갔는데 우리 둘 다 환전을 안 해서 캠프 직원이 먼저 대신 내줬던 첫날밤, 스탑오버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어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룻밤 들렀던 홍.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간에 신경이 곤두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의 서툰 내가 바로, 어둠 속 폭풍우에 하염없이 기우뚱거리는 배였다.



그러나 배도 수차례 흔들리고 나면 균형을 잡는다. 나 또한 그 경험이 있었기에 이듬해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떠나 유럽 이곳저곳을 혼자  수 있었고, 그때 생긴 자신감으로 이더 낯선 곳으로 세계여행을 하기에 이르렀다.


의 폭풍우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배는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을 배가 되었고, 서툴고 소심했던 아이 이 전 세계를 모험하는 사람이 되었다. 슬금슬금 눈치 보며 돌아다던 내가, 이번에는 엄마를 모시 왔다. 루하루 조금씩 흔들리며 여행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이렇게 자라 있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으로 하롱베이 크루즈에 올랐다. 어쩌면, 내 모든 여행의 시작점. 지금의 나의 시작점.


예전에 갔을지도 모, 혹은 완전히 처음 밟아보는 것일지도 모를 땅을 밟으며, 그때보다 사진도 훨씬 많이 남겼다. 지금의 내 모습을, 어디선가 궁금해하고 있을 15년 뒤의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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