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알라딘>
우리 집 서랍장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내가 어릴 적 좋아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들이 남아있다. 이제는 그런 것 없이도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내 어린 시절이 듬뿍 품은 유물들이라 차마 버릴 수가 없다. 그것들이 나를 오래도록 사로잡았던 건 공주와 왕자의 허무맹랑한 동화가 아니라, 각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고민과 꿈과 열망이었다.
백설공주는 계모로 인한 위험에서 벗어나 난쟁이들을 만나 행복을 찾아갔고, 인어공주는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과감히 담보로 걸었다. <미녀와 야수> 속 벨은 작은 마을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를 꿈꿨고,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주저 없이 달려 나갔다.
공주들마다 각자 갈망하는 꿈이 있었고, 그것이 때로는 운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많은 경우 스스로 이뤄보려 노력했던 시도와 선택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세상을 향해 들려주고 싶은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알라딘> 속 자스민 공주는 그런 열망이 특히 더 큰 인물이었다. 궁전 안의 삶을 답답하게 여기고, 원치 않는 사람과 혼인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비극이라 여기는. 자스민이 늘 데리고 다니던 호랑이 라자는 마치 자스민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어린 시절의 내 눈에도 그 모습은 굉장히 당당하고 멋있어 보여서, 자스민이 느끼는 답답함을 온 마음으로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1992년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멋졌던 자스민은, 30년 뒤 실사 영화에서 더욱 강렬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2019년 개봉한 영화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새롭게 추가된 넘버 'Speechless'의 히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압 속에서도 늘 선을 넘지 않고 잘 참아왔던 자스민이 드디어 폭발하는 장면, 공주가 분노하며 자신의 뜻을 선명히 드러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21세기가 그려낼 수 있는 새로운 공주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2011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개막한 뮤지컬 버전은, 애니메이션 및 실사 영화와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영화에 꼭 등장하던 동물 친구들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인간 캐릭터들로 대체되었다. 라자 대신에 자스민의 시녀들이 등장하고, 원숭이 아부 대신 알라딘의 친구들이 등장하며, 악당 자파의 앵무새 이아고는 인간 부하로 바뀌었다. 익숙하게 보던 동물 캐릭터들이 사라진 부분은 아쉽기도 하지만,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고민과 서사가 조금 더 현실성을 얻게 된 듯하다.
또한, 실사 영화에서 대표 넘버로 자리매김했던 'Speechless'는 뮤지컬이 제작된 이후에 생겨난 넘버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뮤지컬에는 자스민이 궁전 밖 자유를 꿈꾸는 'These Palace Walls'나, 알라딘과 함께 현실을 벗어나 저 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A Million Miles Away' 같은 넘버가 있다. 노래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자스민이 내고자 했던 목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내게도 날개가 있는데
여기선 펼칠 수 없잖아
- 'These Palace Walls'
자스민의 목소리처럼, 나에게 <알라딘>은 사랑 이야기보다도 자유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자스민과 지니는 내내 자유를 갈망했고, 알라딘은 자유와 책임 사이를 넘나들며 갈등했다. 결국 악당 자파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자유를 빼앗기며 파멸하는 결말은 이 주제에 가장 완벽한 엔딩이기도 했다.
높은 지위를 지닌 자스민과 대단한 능력을 가진 지니가 원치 않는 억압과 속박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배웠다. 알라딘의 선택들을 보면서는 아무리 자유로운 삶이 소중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건 주의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배웠다. 결국 가장 아름다운 자유를 택하고 행할 수 있는 건, 가장 용감한 자들이라는 것도.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그리고 뮤지컬은, 각각 제작된 시대로 다르고 매체도 다르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요소들이 달라졌다고 해서, <알라딘>이라는 이야기의 본질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가치를 전하는 일이다. 좋은 이야기는 새로운 버전으로 만들어진다 해도, 그 변함없는 가치가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알라딘과 자스민과 지니의 이야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알라딘>의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만나게 될 또 다른 <알라딘>도 기대된다.
[뮤지컬 알라딘]
▷ 개요 :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201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초연되었다.
▷ 제작 : 디즈니 시어트리컬 프로덕션 / 작곡 : 앨런 멩컨 / 작사 : 하워드 애쉬먼, 팀 라이스, 채드 베글린 / 극본 : 채드 베글린
▷ 국내 제작사 : 에스앤코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Arabian Nights', 'Proud of Your Boy', 'A Million Miles Away', 'Friend Like Me', 'A Whole New World'
▷ 2024년 초연 캐스트 (샤롯데씨어터, 2024년 11월 22일~2025년 6월 22일)
알라딘 역 : 김준수, 서경수, 박강현
지니 역 : 정성화, 정원영, 강홍석
자스민 역 : 이성경, 민경아, 최지혜
술탄 역 : 이상준, 황만익
자파 역 : 윤선용, 임별
이아고 역 : 정열
카심 역 : 서만석
오마르 역 : 육현욱
밥칵 역 : 방보용, 양병철
앙상블: 백두산, 오석원, 박종배, 김찬례, 권기중, 김시영, 조영아, 서경수, 백승리, 전예나, 박희애, 심예진, 고민건, 최진
스윙: 이종혁, 강기연, 이정휘, 최원섭, 이동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