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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연 Apr 10. 2022

22년 1분기를 끝내면서

사랑에 대한 원고를 써야 한다. 에리히 프롬 책을 읽었다가, 다른 칼럼들을 읽었다가, 내 원고를 다시 봤다가,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난리도 아니다. 이미 마감 날짜는 훌쩍 넘었고 편집자님은 내게 당근만 주고 계시다. 개요를 짜놨는데, 흐름은 정해져 있는데 나는 자꾸 죽음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


1분기가 끝났다. 화나는 일이 많았다. 직간접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많이 겪었다. 미친 거 아니냐고 욕을 하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기쁘다가... 뭐 정신도 별로 없고, 현실감도 별로 없는 한 시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은 여유를 찾게 되니 뒤늦게서야 말로 정리하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다.




조직에서 구조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건강한 세 마리 아기고양이가 태어났지만, 나는 죽은 아기고양이 유채가 생각나서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서는 조금 울었다. 유채가 살아 있으면 저 남매애들과 함께 어미 고양이의 곁에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별로 쓸모 있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유채는 죽었으니까.


생각해보자면 일전에는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죽은 고양이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그냥 왈칵 울음이 터졌던 적이 있었다. 소원이가 죽었을 때, 케인이가 죽었을 때도 며칠 지나 뒤늦게 울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냥 조금 울다가 내가 좀 슬프구나, 좀 우울한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문제가 없진 않구나 싶다.


몇 년 전에 심리상담을 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쟁점과 지금의 고민 아닌 고민은 동일한 지점에 있다. 사망한 동물의 의식은 멎었고 고통은 사라졌는데, 왜 나는 자꾸 거기에 몰입을 하냐는 것이다.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간에 동물의 의식은 중단되었는데, 내가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꾸 동물의 삶과 고통에 자꾸만 공감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냥 내가 사람이고, 사람인 이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겠거니 싶다. 어쨌든 나도 동물이고 동물인 이상 감정을 느끼는 것은 타고나길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왜 슬퍼하는가? 내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좀 더 나을까? 그냥 그런 정도로만 정리하고 있다. 심리 상담을 또 가긴 가야겠구나... 싶다.




요새는 종종 나의 근속과 내 다음 직장에 대해 고민을 한다. 여기서 일한지 5년이 넘었고, 이제 여기서 어떻게 일해야 할지 좀 알겠고, 그럼에도 서른 살이 된 내 나이가 좀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 이상 근속이 늘어나면 이직 할 때 좀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냥 으레 하는 고민들이건만, 그래도 아직은 여기서 더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대부분 동물에 대한 부채감과, 아주 약간의 정의감과 사랑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그런 이유들이다.


소원이가 보고 싶다. 유채를 처음 만났던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한다. 케인이와 두두를 되돌아가 만난다면 바로 병원에 입원시켰을텐데. 뭐든지 다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잘 했더라도 어차피 그들은 죽었을 것을 알고, 과거는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태어난 이상 죽는다는 것을 알고, 생명이 멎은 이상 그들은 그냥 유기질일 뿐이며 그 어떤 고통도 이제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자꾸 나는 침잠하게 된다. 이것도 별로 그들에게나 세상에 큰 의미는 없는 것은 알지만.


죽은 너희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죽은 이를 대상으로 한 약속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냥 비인간동물이 좀 덜 고통스럽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 나는 이 조직에서 일을 한다. 그게 내 나름의 애도의 방식이라는 걸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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