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장소가 아니라 문장이다
삶에서 미끄러질 때 진실한 문장 한 줄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가장 작은 손잡이가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에 살며 날마다 축제였다 말하지만, 그에게 축제의 북소리는 늘 조용한 곳에서 시작된다. 벽난로 앞에서 귤껍질을 눌러 파란 불꽃을 튀기고, 창가에 서서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속삭이던 주문.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이 한 줄은 문학의 비밀이자, 동시에 삶의 기술이었다. 문장을 쓴다는 건 결국 마음의 체온을 측정하는 일이고,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온도로 세계를 다시 데우는 일이니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누구인가. 전쟁의 파편을 몸에 박아 두고도 사슴의 발자국처럼 간결하게 걸어가는 문장을 쓴 사람. 용기와 절제, 명예와 상처의 무게를 몇 개의 동사로만 지탱하려 한 사람.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다'는 빙산의 윤리를 따른다. 그러나 이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는 그 아래 잠긴 덩어리가 빼꼼하니 얼굴을 비친다. 젊은 부부의 가난한 식탁, 실비아 비치의 서점에서 건네받은 책의 종이 냄새, 센 강변을 걷다 마주친 봄의 숨결. 이 책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기억의 나룻배를 타고, 우리가 언젠가 놓친 생의 리듬을 다시 건너게 한다.
나는 밑줄을 따라 그의 파리를 거닐었다. 강가에서 낚시꾼이 시간을 낚아 올리고, 바지선들이 느리게 계절을 밀어 나르는 풍경 앞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도시의 숲—플라타너스와 느릅나무, 군데군데 서 있는 미루나무—사이에서 봄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지다가, 어느 밤 따뜻한 바람 한 점에 갑자기 도착한다. 봄은 어떤 문장과도 닮아있다. 이미 우리 곁을 맴돌면서도 한 단어 때문에 멈칫하고, 그 단어가 제자리를 찾는 순간 비로소 ‘와 있는’ 계절이 된다. 그가 두려워한 건 봄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할 뻔했다'는 상상 자체였다. 삶은 종종 그 상상 하나 때문에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봄을 믿었고, 봄을 믿는 마음으로 문장을 믿었다.
그 믿음에는 혹독한 윤리도 붙어 있지. 그는 '소설을 생계로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쓸 수밖에 없는 순간까지 기다리겠다고. 압력이 고인 뒤에야 문장을 돌리겠다고. 어쩌면 우리도 사랑이든 꿈이든 쫓기는 마음으로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삶은 늘 스스로 세운 원칙을 시험한다. (기독교에서는 시험에 든다 고도 하지) 그는 사랑 앞에서 두 갈래, 아니 세 갈래의 길에 서고는 '끔찍하게도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젊음은 종종 옳고 그름의 표지판을 잃은 교차로이고, 파리는 '아무것도 단순하지 않은' 도시였다. 가난도, 갑자기 생긴 돈도, 달빛 아래의 숨소리도. 그러니 정직함은 사건의 결론이 아니라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가는 태도다. '한 줄의 진실'은 결국, 내가 복잡하다는 진실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서관에서, 더 정확히 말해 실비아 비치의 서점에서 글쓰기의 날을 세운다. 체호프 앞에서만큼은 칼을 든 외과의사 같았고, 맨스필드를 향해선 독하게 솔직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두고 '다시 읽을 수만 있다면 참 행운'이라면서도 '결국 화를 낼 것'이라며 말장난을 걸었다. 이 시니컬한 판단들은 그의 야성만을 말해 주지 않는다. 자기 문장에 부여한 기준의 높이를 암시한다. 좋은 문장은 사람을 고치되 과하게 절개하지 않고, 도덕을 품되 설교하지 않으며, 감정을 울리되 독주처럼 취하게 하지 않는다. 체호프가 '투명함만 뺀 물'이라면, 헤밍웨이는 아마 표면은 차갑고 속은 끓는, 불이 스친 물에 가까웠다.
헤밍웨이의 이야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친다. 누군가의 사악함을 '명마의 혈통처럼 드러난다'고 적으면서, 어떤 이는 그저 '못생겼을 뿐'이라고 한다. 기묘한 구획, 어딘가 무정한 구분. 우리는 종종 못생김을 사악함으로 오해하고, 매끈함을 선량함으로 오인한다. 헤밍웨이의 칼날 같은 문장은 그런 착시를 찢는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의 허영과 약점도 숨기지 않는다. 낯선 여인의 순간을 '당신은 내 것이고, 파리도 내 것이고, 나는 이 공책과 연필의 것'이라고 속삭일 때, 소유의 망상과 헌신의 진실이 한 문장 안에서 충돌한다. 우리가 가진 것보다 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사랑, 도시, 그리고 문장.
포기하는 것에 대해 그는 담담했다. 좋은 것을 포기하면 허전함이 남고 그 빈 곳은 더 좋은 것으로만 채워진다고. 나쁜 것을 포기하면 공허는 저절로 사라진다고. 삶은 장바구니가 아니라 서랍이다. 아무거나 던져 넣으면 엉켜 버리고, 비우면 비로소 필요한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허전함은 삶이 더 나아질 여백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그 여백을 두려워하지만 그 틈으로 봄이 들어온다. 그리고 봄은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헤밍웨이가 말하는 '움직이는 축제'는 밤마다 불꽃놀이를 하는 도시가 아니라, 마음이 이동할 때마다 따라오는 은밀한 환영식이다.
이 책은 헤밍웨이 사후에 정리되어 1964년에 처음 나오고, 2010년에 손자인 숀 헤밍웨이가 미완성 원고를 덧대 복원했다. 결말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 본 흔적. 삭제선의 먼지, 후회의 체온이 고스란하다. 이 불완전함은 책의 결점을 드러내기보다는 틀리고 고쳐 쓰고 흔들리는 살아 있는 기억의 방식을 증언한다. 완벽이 아니라 수정이 우리를 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로다.
결국 이 책에서 건져 올린 것은 파리 관광 지도가 아니라 하루를 건너는 방식이다. 일이 막히면 귤껍질의 냄새로 시작하는. 불 위에 떨어지는 작은 주황색 한 방울을 눈으로 본 뒤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한 줄을 적자. '오늘은 바람이 나를 데리고 걷는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른 누군가는 멀어진다.' '봄은 오지 못할 뻔했지만, 결국 온다.' 이렇게 한 줄을 만나면 다음 줄은 저절로 오고, 문장은 문장끼리 손을 잡는다. 그 손잡이들이 이어져 다리 하나가 놓이고,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어제보다 멀리 간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 그렇게 만난다. 당신이 쓴 한 줄의 진실이 내 안의 봄을 데려오고, 내가 쓴 한 줄의 진실이 당신의 밤을 덜 춥게 한다. 헤밍웨이가 젊은 날 파리에서 배운 것도 아마 이 간단한 비밀이었을 것이다.
축제는 장소가 아니라 문장이다.
축제는 돈이 아니라 정직이다.
축제는 화려한 악기가 아니라 '걱정하지 마'라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낮은 목소리다.
우리가 매일 한 줄씩 진실에 도착한다면 파리는 우리 곁에서 날마다 축제로서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