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게을러서 망가진 게 아니라 남의 꿈으로 설계된 트랙에서 너무 오랫동안 달렸다. 이제는 서로의 시간을 지켜 주며 그 트랙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나와 당신의 문장은 오늘도 같은 페이지에서 만날 것이다.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은 내게 '반드시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라는 작은 구급약을 건넨다. 낡아 빠진 위로 같지만 이 책의 문장은 도리어 차갑고 맑다. 누가 우리에게 이 속도를 강요했는지, 누가 우리의 피로를 수익으로 환전했는지, 누가 '하면 된다'를 '해야 한다'로 단단히 굳혀 우리 등을 떠밀었는지. 이 책은 집요하게 묻는다.
앤 헬렌 피터슨은 버즈피드의 수석 작가였고 지금은 뉴스레터 ‘컬처 스터디’에서 대중문화와 정치, 노동, 돌봄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본다. 2019년, 조회수 700만 회를 넘긴 칼럼 '밀레니얼은 어떻게 번아웃 세대가 되었는가'의 연장선이 된 이 책에서, 그는 자기 계발 대신 구조를, 개인 탓 대신 맥락을 들이민다. 이 책이 관통하는 태도는 명징하다. 세대를 선동하지 않겠다. '요즘 애들'의 애들이 아니라 '요즘'이라는 구조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대체로 염치없을 만큼 솔직했다.
실로 밀레니얼은 부머의 제일 끔찍한 악몽이다. 왜냐고? 대체로 한때 그들이 가장 좋은 마음으로 키워낸 꿈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부머와 밀레니얼에 대한 대화에서 이 내용은 자주 생략된다. 어렸을 때부터 베이비붐 세대는 말 그대로 우리의 부모, 교사, 코치였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우리를 빚은 이데올로기와 환경을 만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해, 다방면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 교사, 코치로서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를 빚은 이데올로기와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니 책임의 일부는 그들에게 있다—이 문장은 비난의 묵직한 돌을 던지기보다 경로를 그려 준다. '하면 된다'의 시대를 믿었던 사람들의 선의를, 그리고 그 선의가 만든 트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금을.
그 트랙 위에서는 시간을 들인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다. 출근이 더 빠를수록, 퇴근이 더 늦을수록, 더 그럴듯한 헌신처럼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더 긴 근무시간은 생산성이 아니라 '헌신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일 뿐'이라고. 사무실에서 오래 머무르는 일은 종종 무언의 자랑이 되고, 그 자랑은 금세 기준이 된다. 기준은 타인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은 번아웃으로 직행하지. 나도 예전에 남아서 불을 끄는 마지막 사람이 칭찬받는 회사를 다녔다.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쉬어야만 하는 밤이, '내가 이만큼 남았다'를 인증하는 무대가 되다니.
번아웃의 바닥에는 구조가 있다. 피터슨은 '아웃소싱은 직원에게 안정적인 임금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적는다. 월급봉투는 얇아지고, 스케줄은 뒤틀리고, 복지는 애매해진다. 그 대신 주식시장의 그래프는 올라간다. 선택지가 부족한 사람들 위에 설계된 구조—그 설계는 몇몇의 부를 높이고, 다수의 삶을 얇게 만든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게을러지지 않았고, 멀티태스킹 능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조건이 나빠졌을 뿐이다. 나빠진 조건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아마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이 착각이야말로 구조가 개인에게 이관해 놓은 가장 값싼 비용이다.
여가의 장면에서도 구조는 작동한다.
우리는 TV를 보고, 우리 몸을 억지로 쉬게 하기 위해 마약을 더 많이 하고 술을 마시고, 늦어서 미안해요, 집에 있는 게 더 좋거든요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내향적 행동을 추앙한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느끼려 애쓴다. 하지만 내가 떨칠 수 없는 생각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지금 우리가 여가 시간에-안 그래도 부족한데 뭘 하겠다는 과욕으로 더욱 피로해지는 시간에-해온 것과는 다른 일을 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좋은 자아는, 가장 호기심 많고 창의적이고 온정적인 자아는, 우리가 아는 지금 삶의 표면 바로 아래,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에겐 그것들을 현실로 데려올 공간과 시간, 휴식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우리는 여가를 피곤하게 만드는 방식 대신 다른 걸 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호기심 많고 온정적인 자아는 놀랍게도 가까이에 있다. 그 자아에게로 가는 길은 더 많은 앱이나 루틴이 아니라, 아주 둔하고 느린 시간이다. 무언가가 되어 가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아무것도 되지 않는 시간. 우리는 그 시간만큼은 유능하지 않아도 괜찮다.
돌봄의 시간은 특히 불균형하다.
유치원에 다닐 연령의 자녀를 둔 워킹 맘은, 밤중에 아이가 깼을 때 같이 깰 가능성이 아버지보다 2.5배 높다. 유아를 키우는 아버지는 주말에 ‘여가’로 보내는 시간이 어머니보다 두 배 길다.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가을에 주말마다 풋볼 경기를 보고 야외 파티까지 참석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아내가 그런 일정을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내내 보내지 못하게 한다고 화를 냈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여가 시간을 누릴 자격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많은 아버지가 본인의 여가 시간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으리라 믿지만) 많은 아버지에게 여가는 권리로, 많은 어머니에게 여가는 불법처럼 배당된다. 이 불평등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배분, 곧 삶의 질서 문제다. '당신도 쉬어.' 이 한마디가 가정에서, 팀에서, 사회에서 동시에 필요하다. 누가 쉼을 누릴 권리가 더 많은가가 아니라 쉼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삭제되는가를 묻는 일.
피터슨은 자본주의의 얼굴도 벗긴다.
자본주의는 절대 자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를 무조건 칭찬하도록 길러진 미국인들에겐 그런 말을 듣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하는 것이 불변의 목표라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윤이 증가하는 한 직원들을 기계 부품처럼 착취해도 된다. 그러나 대공황 후부터 1970년대 침체 전까지 자본주의는(적어도 미국에서는), 다소 인간적이었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배타적이며 시장의 변덕에 끌려다녔어도, 인간적이었다. 이 시기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에도 반드시 지금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증거다.
그 시기 자본주의가 (약간) 더 노동자 친화적이었던 건 기업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노동조합과 정부 규제로인해 당시 기업들은 고용인들을 사람답게 대해야만 했다. 아플 수도 있는 사람, 자녀가 있는 사람, 일하다가 다치기도 하는 사람, 일자리 하나에 쓸 만큼의 에너지만 가진 사람, 그러니 일자리 하나만 가지고도 먹고살 수 있는 임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 일 바깥에도 인생이 있는 사람으로 대우해야 했다.
그러나 기존 규제를 회피할 방법들과 함께 찾아온 규제 완화와 반노조 입법은, 자본주의를 가장 무자비한 모습으로 되돌려놓았다. 경제는 번창하지만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기업이 비교적 자애로웠던 시기에 형성된 중산층은 꾸준히 움츠러들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연구한 인류학자 캐런 호 Karen Ho는 이렇게 설명한다. ˝근래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독특한 지점은, 기업에게 인식되는 이익과 직원 대다수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절대 자애롭지 못하다.' 그러나 한때는, 노동조합과 규제가 그 자본을 사람 쪽으로 기울게 했다. 기업이 양심에서가 아니라 제도에서 사람을 대우하도록 되어 있던 시절. 그때는 '일 바깥에도 인생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제도에 새겨졌다. 규제가 완화되고 노조가 약화되자 기업의 이익과 다수의 삶이 갈라졌다. 그래프는 오른다. 삶은 내려앉는다. 이 간극이 번아웃의 온도다.
이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번아웃을 해결하려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의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이 살고 싶은 인생, 당신이 찾고 싶은 삶의 의미와 결이 다르다는 착각을 지워야 한다. 번아웃상태가 단순한 일중독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당신에게서 일할 능력을 뺏는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더 발굴해 낼 자아가 남아있을까? 아무도 당신을 지켜보지 않을 때, 제일 저항이 적은 경로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때, 당신이 뭘 좋아하고 뭘 좋아하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을 아는가?
자신에게 다시금 전념하고 자신을 아끼는 것은 이기적이지도, 자기중심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이는 가치의 선언이다. 당신이 일을 하고 소비하고 생산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번아웃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그 수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그래서 해결은 더 잘 일하기가 아니라 다르게 존재하기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오래된 버릇에 눈이 간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증명한 뒤에야 스스로에게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 버릇. 존재는 허락이 아니라 선언이어야 한다. '오늘, 아무도 지켜보지 않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몸에 너무 크지만, 천천히 맞춰 입을 수 있는 옷 같다.
그리고 가장 고독한 설득이 이어진다.
모든 개인이 자신을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과 제로섬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독립 계약자로 간주할 때, 유대는 혐의가 된다. 개인이 일하지 않고 보내지 않는 모든 순간이, 다른 누군가가 앞서 나가서 그를 불리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서로의 쉬는 순간이 질투의 사유가 되는 사회. 휴가를 쓰는 동료에게 마음속으로 벌점을 주는 우리. 피터슨이 제안하는 탈출구는 단순하다. 제도가 아니라 연대. 자기 돌봄이라는 몽글몽글한 단어가 제도와 연대를 대체할 수 없다는 고백. 우리는 서로에게 '너의 쉼이 내 불이익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요즘 애들』 은 밀레니얼의 궤적을 연대기처럼 따라가되 심리를 해부하기보다는 구조의 계보를 그린다. 교육의 트레드밀, 감시되는 업무, 아웃소싱과 금융화, 워라밸에 대한 강박, 젠더화된 돌봄, 셀프헬프의 한계,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 인터뷰와 사례는 구체적이고 문장은 단호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이 책이 우리를 ‘불쌍한 세대’로 호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피터슨은 우리가 처한 설계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 뒤 한 발 물러서 말한다.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좋은 삶은 효율이 아니라 호흡의 일이다. 당신이 잠깐 멈춘다고 뒤처지지 않는다. 그 시간에 누구도 당신을 벌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존재하므로 이미 충분하다. 그러니 오늘은 이 문장을 서로에게 건네자. 우리에겐 더 느린 속도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서로의 여가를 의심하지 않을 예의가 있으며, 공동의 시간을 다시 설계할 상상력이 있다. 번아웃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잘못 설계한 구조의 문제다. 설계는 바뀔 수 있고, 그 첫 도면은 여기서 시작한다.
'반드시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오늘은 이 문장을, 나와 당신의 문장으로 만든다.